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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에그시] 왕이 된 남자-1

갑자기 왕이 된 웨일즈도령 에그시


철종클리셰주의 / 배경은 현대
에그시19살, 해리 40대 중반.
알오버스주의.

오타주의




1.

 여름의 햇살은 지구상 어디를 막론하고 뜨겁다. 오늘 오전 마을에선 바깥활동을 자제하라는 경고 사이렌이 울렸지만 농사일을 하는 입장에선 날씨 때문에 일을 접고, 집에서 쉬고 하는 일들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의 김매기가 있고 내일은 또 내일의 김매기가 있으니. 그저 나라에서 경고한 오후2시~4시만 피할 심산으로 아침 일찍 새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멀지 않은 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전만해도 두 사람의 발소리와 재잘 거리는 듯 한 저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지만 지금은 흙바닥을 조심히 스치는 자신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환과 도시에 가면 별것 아닐 것 같은 그 병환을 이겨낼 경제적 능력이 없어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버텨내야 하는 집안의 사정으로, 에그시는 오늘 혼자 밭에 나섰다.

점점 높아지는 해는 점점 짧아지는 그림자로 알 수 있다. 대략 10시쯤 되었으려나. 에그시는 손목의 하얀 흔적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여름이 되기 전까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다 피부가 점점 타는 것 같아서 시계를 풀었을 때 이미 그 흔적이 하얗게 남아 '늦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계속 시계를 차고 다닐까 했지만 더운 날씨 탓에 스스로도 자주 물에 들어가는지라 한 여름 동안은 차지 않고 다니기로 했다. 시계가 없어진 지금 햇빛을 받지 않아 곱고 하얀 피부는 제 몸에 오로지 여기 뿐인듯 했다. 그리고 여전히, 에그시는 지금의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아직 제 밑의 그림자의 길이로 정오가 조금은 더 남았음을 알아챘을 뿐이다.


"에그시!!!"


 처음에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부르는 그 목소리에 에그시는 쪼그려 앉았던 허리를 펴고 언덕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직 어떤 인기척도 보이질 않아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할 때 한 번 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그시!!!"
"에밀리?"


저 아래 수수밭의 높다란 수수들에 키가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그녀가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미쳐 다 잇지 못한 말을 호흡과 함께 뱉어냈다.


"하...하악.... 너...후..사람들이...찾아."
"사람들? 누구?"
"너네...아효 힘들어. 너네 집에... 하아... 왕궁에서...후아.. 사람들이 찾아 왔...아이고... 왔어."


 툭툭 끊어지는 그녀의 말이 답답했지만 모자란 숨을 집어삼키느라 정신없는 그녀를 보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궁? 왕실사람들이 왔다고??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이고 힘들어... 아무튼... 하... 너희 어머니가 뒷문으로 나오셔서 날 너에게 보내셨어."
"어머니가?"


 어머니가 뒷문으로 나와 급히 사람을 보냈다는 말은 상황이 그만큼 다급하다는 증거였다. 아버지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이때에 어머니가 절대 그 곁을 떠날리 없을 텐데. 에그시는 그대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단 세 걸음을 떼기도 전에 에밀리가 겨우 그의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어디가?"
"집에 가야지."
"멍청아. 니가 집에 가야 되는 거면 내가 이렇게 뛰어왔겠냐? 그냥 마을방송해서 '에그시, 집에 오란다' 이러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어머니가 절대로 집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어."
"뭐..?"
"왕궁에서 한 두 사람이 온 게 아니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그 말에 에그시는 까치발을 하고 마을을 내려다보다 수수밭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근처의 나무로 올라 그 사이에 숨어 조심스럽게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에밀리의 말은 사실 이었다. 정갈한 차림새를 한 남자들과 TV에서나 본 왕실 호위병의 사람들,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보통의 길거리에선 보기 힘든 백마8마리가 끄는 금장을 한 커다란 마차. 그것이 자신의 집 주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마을을 뒤 덮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줄을 지어 있었다.


"너 거기 있다가 들켜! 내려와!"


 그 놀라운 광경에 점점 몸이 나서는 것을 에밀리의 만류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왜 온 건데?"
"몰라. 근데 일단 저 사람들이 너를 찾아."
"나???나를????"
"어. 그것 때문에 너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는 그런 사람 없다고 하는 것 까지 봤어."
"아버지가? 지금 불편하실 텐데.."
"응. 그렇게 화내시는 거 처음 봤다. 게다가 너를 묻고 다니는 사람이 키가 막 이- 만해가지고는 조용조용 얘기하는데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라는데 와 목소리도 되게 좋아. 마을사람들이 다 구경나왔는데 너네 아버지가 너무 버럭버럭 하면서 '에그시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막 이래서 사람들이 다 말하면 안 되는 구나~ 하고 있어."


 에밀리의 재현은 꽤 재밌는 편이었다. 전날 본 드라마도 그대로 재연하는 재간둥이 인지라 마을 사람들 모두 말을 전하는 그녀를 반기고 재밌어 했지만... 지금의 에그시는 그 모습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근데 너 뭐 잘못했어?"
"내가 무슨 잘못을 해."
"근데 왜 왕실에서 사람들이 너를 찾고 너희 아버지는 그런 사람 없다고 감추냐는 거야."


에그시는 여전히 자신의 집 쪽으로 향해 서있었다. 사람들이 사라지면 언제든 달려내려갈 수 있게.


"게다가 너네 어머니 말씀이 너한테 무조건 집에서 멀리 도망치라고 하셨어."
"뭐?"
"몰라. 그냥 나한테 그렇게만 전해달라고 하셨단 말야. 나중에 다 말해준다고."
"난 잘못한 게 없어."
"너도 모르게 뭔가를 잘못 했나보지. 아무튼 돌아오면 큰일이 난다고 하면서...."
".... 왜? 뭔데?"
"....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너 정말 잘못한 거 없어?"


 죽을 수도 있다니. 자신은 태어나기도 웨일즈에서 태어났고 왕실의 소식은 뉴스에서 전해주는 것을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다. 친구들과 말장난을 하면서도 감히 왕실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모욕한 적이 없고 집안에서도 왕실의 이름은 그다지 거론한 적도 없었다. 그때.... 몇 년 전의 기억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아!..."
"왜? 무슨일 했어?"


 몇 년 전... 흉년이 들어 집안이 어려워 졌을 때 아버지께서 찬장 한켠에서 오래된 상자를 열었었다. 그 안엔 작은 금장식이 있었는데 자신은 그 문양이 무엇인지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아버지는 에그시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며 미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어머니께서는 그저 미소 지으며 '그저 골동품이란다.' 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작은 골동품에 왜 아버지께서 저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는지 에그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것을 들고 나간 아버지는 그날 저가 좋아하는 소고기와 생필품을 잔뜩 사들고 왔고 그날은 아주 오랜만에 정원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몇 일 후 TV에서 우연히 그 문양을 봤다. 윈저 궁의 상징인 사자문양. 왕가의 물건은 함부로 팔아서도 함부로 사서도 안 되는 것인데... 그날 에그시는 몇 일 전 먹었던 소고기가 속에 얹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온가족이 압송되는 것인가.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 자신만을 찾아댔다.


"에밀리."
"응."
"일단... 내가 몸을 피할 테니까. 지금 어머니한테 가서 3일쯤 뒤에 들어온다고 전해줘."
"뭐? 어디로 가게?"
"저 밑에.... 아니야. 너도 괜히 내 정보를 알았다간 위험해질지도 몰라."
"뭐어??? 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왜 그러는데?"


 에그시가 다시 까치발을 들어 아래를 보자 그들이 집에서 빠져나와 산위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언윈가의 밭이 이쪽에 있다고 말하는 것일 테지. 에그시는 다급하게 에밀리의 팔을 잡고 말을 이었다.


"지금 저 사람들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어."
"어?어??"
"여기 있다간 너도 위험해지니까 저쪽으로 돌아서 내려가고 날 물으면 그냥 모른다고 해. 어머니께도 은신해 있다가 가겠다고 전해줘. 알았지?"
"응..."


 에그시는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집과는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짧아져 있었고 이제 조만간 정오가 될 것이다. 평소 같으면 어머니는 에그시의 점심식사를 걱정할 시간에 지금은 그의 안위만을 걱정할 것이다. 사람의 그림자가 오로지 발밑에만 존재할 무렵 에그시는 마을외곽의 가장 어두운 숲으로 들어섰다.




-




 에밀리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왕실사람들은 몇몇의 호위병을 제외하곤 전부 없어졌다. 그 호위병들이 대문을 떡하니 지키고 있어 에밀리도 대문으로 들어서진 못하고 에그시의 어머니가 자신을 찾았던 집의 뒷문을 찾아 그 집안으로 조심히 들어섰다.


"아주머니."
"오, 에밀리."


 부엌의 식탁에 무너지듯 주저 앉아있던 미셸은 땀을 잔뜩 흘린 에밀리를 보자마자 번쩍 일어나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리곤 자신의 앞치마를 들어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는 살짝 바깥을 보며 차가운 물을 내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곳엔 리가 침대모퉁이에 또 무너지듯 앉아있었다. 그도 역시 에밀리를 반가워했지만 둘은 그녀가 물 컵을 절반이나 비울 때까지도 아무런 말도 잇질 못했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에밀리였다.


"에그시가 3일 뒤에 들어온대요."


 둘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그중에서도 리의 표정은 에그시의 소식을 반가워하면서도 동시에 참담해보였다.


"어디로 간다고 하니?"
"저도 물어봤지만 제가 알면 저도 위험해 질 거라면서 가버렸어요."
"그래... 그랬구나..."
"그... 북쪽의 숲으로 가긴 했어요."
"...뭐?"
"이건 되게 예전에 에그시가 비밀이라 그랬던건데..."
"거긴 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얘기 했는데..."
"네. 근데 저랑 사실 몇 번 갔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래서 길은 잘 알거예요.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그래. 에밀리 말이 맞아요. 그 정도 되는 숲으로 들어가야 저 사람들이 찾지 못할 거예요."


 미셸의 말에 리는 잠시 눈을 감으며 아주 오래된 생각에 빠졌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대낮에도 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그 숲에서 만난 묘령의 여인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보자마자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던 것을 잊지 못한다. 그때만 해도 자신은 성씨만 '윈저' 일뿐 왕실의 일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입에서 '어찌 이리도 귀한분께서 이 어두운 숲에 드셨습니까.'하는 말을 듣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 아버지를 보챈결과... 자신이 왕실의 일족임을 알았고 또한 역적의 집안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에그시가 태어나기 전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윈저'를 버리고 스스로 '언윈'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 여인이 에그시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아직 우리는 역적의 가문일 뿐이다.




-




 시계도, 그 어떤 첨단장비도 없이 울창한 숲속에서 시간을 알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이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음을 의미했고 저 멀리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오후6시를 넘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도시에만 살았다면 알 수 없는 시간의 개념들을 에그시는 하나하나 맞춰가며 더 어둡기 전에 안전하게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밭에 나가고 나서부터는 이 숲에 들지 않았기에 에그시는 그새 바뀐 자연환경으로 몇 번이나 길을 잃을 뻔 했다. 그럴 때마다 익숙한 바위나 익숙한 나무가 나타나 마치 그에게 누군가 자연스레 길을 안내하는 듯 했지만 점점 어둑해지는 이 시점엔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조금씩 제 곁에 반딧불들이 나타나는 것이 최소 30~40분내로 완전히 어두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어렸을 적 찾아낸 계곡 근처의 동굴로 가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이대로라면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 조차 에그시는 알 수 없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봐. 이거 놓고 얘기해. 이러다 다치겠어."
"어떻게... 어떻게 에그시에 대해 말 할 수 있냐고!"
"아니, 왕실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밀려왔는데 누구라도 겁을 먹지 않겠어?"
"네놈이 돈을 먹은걸 모를줄 알고? 대체 왜!!"
"이것 좀 놓으라고."


딘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리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자신에게서 쉽게 떼어냈다. 병약한 몸에 화를 내었던 탓인지 숨을 몰아쉬는 리의 앞에서 딘은 그의 멱살질로 구겨진 자신의 냄새나는 셔츠를 눈에 띄는 동작으로 탁탁 털어냈다.


"그러게 죄를 지었으면 순순히 따라가야지."
"죄를 짓다니!"
"아니 무슨 대역죄 같은 게 아니고서야 경찰도 아니고 왕실이 오겠어? 그리고 왜 그렇게 숨기는 건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마."
"아, 그리고 나도 에그시가 어딨는지는 정확하게 몰라. 그저 제 밭에 가 있는게 아닌가~ 하고 말해줬을 뿐이지. 그런데 그렇게 큰돈을 줄지 누가 알았겠어?"
"이 자식이..."
"에그시란 사람이 없다고 우겨봐야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말했을 거라고. 다들 안 그래?"


 딘은 어느새 싸움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모든 마을사람들의 그의 말에 동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에그시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리를 보며 말리지 못해 안타까워 했을 뿐이다. 미셸은 그의 몸을 겨우 부축하며 딘을 한번 노려보고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려했다.


"진짜 무슨 큰 죄를 짓지 않고서야 왕실에서 사람들이 오겠냐고!!"


 큰소리로 이죽거리는 딘의 앞에 선 것은 일전에 에밀리가 봤다는 그 훤칠키에 정장의 차림새를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항상 들고 있는 긴 장우산으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내리 찍고는, 그 동네 인근에선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고급스러운 억양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당신이 그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언행을 삼가시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위압적인 힘이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딘 역시 대충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이상 딘 역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샌님에게 약한 모습으로 물러난다면 향후 몇 달은 놀림감이 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봐요. 내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당신네들도 에그시를 찾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딘의 입에서 한 번 더 거론되는 그 이름에 리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돌아봤다. 그런 아이는 없다고 그렇게 울부짖었건만 저자가 모든 것을 망쳐놓고 있었다.


"죄를 지어 찾는 것이 아니니 더 이상 함부로 입을 놀리면 나도 참지 않을 겁니다."
"참지 않으면 어쩔 건데? 하, 나 참."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니 언윈의 집을 지키던 호위병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왕실의 사람은 오로지 눈앞의 이 자 뿐이었다. 그런 동향을 살펴보느라 말을 삼가는 사이 그 남자는 자리에서 돌아서 리에게 한걸음 정도 뗐고 그 사이 뒤에선 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곱게 자란 샌님 같은게 돈이나 좀 쓰면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아는 모양이지. 에그시를 찾아다가 어디 왕실의 노리개로 라도 쓸 요량인가. 참."


 그 말에 분노하는 것은 병약한 리보다 수트를 입은 남자가 더 빨랐다. 맑은 날과 어울리지 않게 손에 든 장우산의 밑을 잡아 손잡이로 그의 목을 걸어 잡아당기며 무릎으로 그 어깨를 가격했고. 그 재빠른 동작에 나가떨어진 딘을 잡아 일으키며 그의 등을 한 번 더 우산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우산'을 사용한 재빠른 일격들에 마을 사람들 모두 숨을 죽였고 리와 미셸 마저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끔은 매가 교육이 될 때도 있는 법이죠. 매너를 배우셔야겠습니다."


 그 남자의 마지막 일격에 딘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오르내리는 부푼 배가 살아있음을 의미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꼭 딘을 죽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리에게 돌아서서 가볍게 목례하고는 그 앞을 지나쳐 나가려 했다 .


"진짜로 온 이유가 뭡니까."


 리의 목소리에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내 아들을 찾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리의 말에 미셸이 그의 팔을 당겼다. 리가 처음으로 에그시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남자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돌아서며 리를 향해 서서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이곳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자가 앞장서 언윈의 집으로 들어갔다.




-



"에이 젠장..."


 아침잠을 깨우는 상황은 꽤나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에그시는 지금의 상황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등에 떨어진 새똥이라니.... 진짜 절묘하기도 하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잠이 들어 다리를 길게 뻗은 상황에서...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발등에 떨어진 새똥이라니... 갑자기 누군가 발등을 내려치는 기분에 번뜩 깼고 지금의 저는 그 발등을 바라보며 들리지도 않을 욕지거리를 계속 내뱉는 중이었다.
 더러워진 기분을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날이 밝았는지 숲 안에 햇살이 비치고 있었고 다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흔한 핸드폰도 없이 위험한 길로 들어왔음을 한 번  더 후회했다. 배고프다... 어제 저녁 겨우 찾아먹은 산딸기로는 허기를 채울리 만무했다.

 다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온 에그시는 발에 뭔가 걸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아오..."


 갑자기 전해진 충격으로 엉덩이를 부비며 일어나니... 자신의 발에채인것은 음식이 담긴 바구니였다. 갑자기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약간은 식어버린 빵과 우유와 과일이라니... 당장이라도 집어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에그시는 일단 경계하기로 했다. 자신말곤 이 숲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믿었는데 이렇게 사람의 음식을 가져다 놓다니. 분명 자신을 찾는다는 놈들의 소행임이 분명할텐데...


"그냥 드셔도 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그시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쪽을 향했다.


"누구세요?"
"...."


 정체를 묻는 말에 그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언뜻 봐도 머리가 흰 여인은 자신에게 자세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먼저 허기를 달래시지요."
"저한테 왜 존대하세요?"
"...."


 여인은 살짝 미소 짓는 듯 하다가 한걸음 다가와서는 바구니안의 빵을 집어 들어 에그시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독이 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왜 존댓말을 하시냐구요."
"제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 이시니까요."
"제...제가요?"


 여인은 고개를 들어 에그시의 눈빛을 가만히 마주보다가는 살짝 미소 짓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시면 저는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음식을 다 드시거든 바구니는 자리에 두시고 저쪽의 사자바위를 타고 돌아나가시면 됩니다."
"어디로 가는 길인데요?"
"공께서 가야하실 길이지요."
"...고..공이요?"


 그 존칭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 에그시는 다시 한 번 그녀의 행색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그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떠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에그시는 자신의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 의심스러운 음식들을 집어먹었다.




-



 처음 그 여인이 가리킨 바위가 사자바위라 했을 땐 그게 왜 사자바위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했을 뿐. 그러나 그 바위에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왜 사자바위 인지 알게 되었다. 마치 포효를 하는 수사자의 모습 같은 독특한 모습의 바위였다. 자연 속에서 발견한 재밌는 형상의 바위에 에그시는 살짝 미소지으며 바위를 조심히 쓸어냈고 바로 그 옆의 코너로 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말을 믿었던 탓일까. 좁은 길에 미끄럽기까지 한 길 때문에 에그시는 산 밑으로 한참이나 미끄러져 내려갔다.


'쿵'


"아야..."


 그 새똥 묻은 발이 기어이 접질린 것인지 자리에 앉아 한참을 신음하는데 그의 머리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혹시. 에그시 언윈이라고 아십니까."
".....네?..."


 올려다본 자리엔 숲속의 옅은 햇살을 등지고선 커다란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완전히 자리에 숙여 에그시의 눈을 마주하고는 그 눈빛을 한참이나 마주했다. 그리고 에그시의 일렁이는 초록빛 눈동자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모른다고 바로대답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려 할 때 남자는 바로 한쪽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무...뭐 하시는거예요?"
"새로운 왕에게 인사를 여쭈옵니다."


 에그시는 자신의 뒤에 그 '왕'이라는 자가 서있기라도 한 건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로지 자신뿐 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이 괴이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에그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눈앞의 남자는 정중하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에그시는 뭔가에 영혼이 팔린 사람처럼 그 손을 잡아 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뭘요?"


그 말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고 에그시는... 한마디로 속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2.


 에그시를 일으키고는 자리에서 물러난 남자는 자신의 시계... 라기보단 손목에 달린 전자장치로 보이는 것을 몇 번 터치로 두드리더니 바로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몇 번 두드리곤 다시 손목의 그 기계를 바라보았다. '53°09'29.6"N 4°...' 이상한 숫자 조합을 읽느라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쭉 내밀자 남자는 자신의 손목을 쉽게 볼 수 있도록 오히려 에그시에게 내밀었다. 자신이 읽으려 했다는 것도 잊은 채 그 남자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몸을 뗀 에그시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지척에 서있는 남자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컸지만 그 시선이 올라간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남자는 에그시가 서있는 위치보다 조금 더 낮은 곳으로 서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하며 말을 이었다.


"이 곳의 위치입니다."
"네?"


 남자는 웃으며 다시 손목의 기계위에 뜬 숫자를 보였다.


"궁금해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의 극진한 존대에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그는 에그시에게 왕이니 뭐니 하면서 계속 아래쪽에 서있었다. 대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혹시나 TV쇼에서 진행하는 몰래카메라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럼 이 근처에 카메라맨이 숨어 있는걸까?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그도 에그시를 따라 두리번거리며 뭔가 살펴보는 듯 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


 다시 시선을 돌려 그 남자를 보고는 에그시는 한 번 더 주위를 관찰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작은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 말도 안돼. 에그시는 낮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고 그 표정을 관찰하던 남자는 신호가 온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산길이 깊어 이쪽으로 올 수 없다고 하네요. 모시겠습니다."
"저... 저기요."
"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네?"
"왕이라고요? 전 그런 거 몰라요. 제 말투 들어보면 아시잖아요."
"왕은 말투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 윈저 궁에 저 같은 웨일즈 촌뜨기가 어울릴 리 없잖아요. 장난 그만하세요."
"... 왕께선 절대로 자신을 하대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보다 지엄한 분이시니..."
"아 진짜!!"
"...."
"왕 이런 거 아니라고요!! 알았어요. 제 풀네임은 에그시 언윈이구요. 아버지는 리 언윈이예요. '윈저'는커녕 공작이나 백작의 성씨 근처에도 못간다구요. 세상에 어느 왕이 밭에서 김매고 그런답니까."
"리 공께서 아드님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비밀로 삼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래요."
"리 공께서 직접 그러시더군요."
"....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는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그가 앞서 길을 나서면 그 뒤를 따를 생각이었던 에그시는 갑자기 제 눈앞에 자리 잡은 넓은 등에 할 말을 잃고 바라보다가 무슨 제스처인지 눈치를 채자마자 겨우 입을 떼었다 .


"....거...걸을 수 있어요."
"조금전 일어서시면서 다리를 저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치료에 나서야 하지만 저에게 가진 도구가 없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음을 용서하시지요."
"으..으...."


 에그시의 앓는 소리에 남자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며 뒤돌아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 아무튼 뭔지 알겠는데 저는 일단 그런 .... 아니 그 정도의 존대는 받아 본적이 없어서 지금 소름 돋았거든요."
"...왕실의 법도 란게..."
"아니 백번 양보해서 내가 윈저라고 쳐도! 업혀서 내려가진 않을래요."


 에그시는 남자를 밀치며 한걸음 내딛었고 조금 전 제대로 접질린 탓인지 그대로 '윽'소리를 내며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팔을 세게 쥐었다. 한눈에 봐도 값이 나가 보이는 남자의 양복이 구겨졌지만 발목의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할 틈도 내질 못했다. 그저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여전히 남자의 팔을 붙잡은 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섰을 뿐이었다.
 팔을 잡힌 채로 잘게 떠는 에그시를 바라보던 남자는 보일 듯 말 듯 한 옅은 미소를 띄더니 자리를 바꿔 에그시의 앞에서며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업히는 자세를 취했다. 엉겁결에 낯선 남자의 등에 엎혀 버린 에그시는 '으익'하는 이상한 소리까지 냈지만 그가 에그시의 다리를 당겨 꽉 붙드는 행동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가 제 손의 더러움이 그 고급양장에 묻어나는 것을 보고 주먹을 쥐고는 어깨위로 살짝 얹어 중심을 잡으려 했다.

 산중에서 자신을 업고 내려가는 남자의 몸은 가벼웠다. 눈앞에 보이는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희끗한 흰머리와 그가 쓴 안경 밑으로 아주 옅은 잔주름들이 보이는 걸로 봐선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장성한 청년을 등에 업고 산을 내려가는 그 움직임이 믿기 힘들 정도로 가벼워 에그시는 잠시 그의 걸음에 넋을 놓고 있었다. 제 무게가 있는 만큼 조금은 버거워 했지만 그는 숨을 몰아쉬지 않았다. 단지, 한여름에 껴입은 긴팔정장의 탓인지 얼굴 옆으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소리 없이 얼굴을 타고 목 줄기로 흘러내리고 있었을 뿐. 땀에 절은 몹쓸 냄새가 날것도 같은데 남자의 몸에선 시원한 향기가 옅게, 그리고 덥게 피어올랐다. 깨끗했던 그의 옷깃이 땀으로 조금씩 얼룩덜룩 해질 때 쯤 에그시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히 말을 건넸다.


"근데... 누구세요?"
"전하를 봉영하는 임무를 맡은..."
"봉영이 뭔데요?"
"... 황실로 전하를 모시는 행차를 말합니다."
"...."


 남자의 대답에 에그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업힌 채로 어느 정도 큰길로 들어서면 자신이 탈 수 있는... 어제 내려다보이던 그 마차를 타고 정말로 정든 고향을 떠나 궁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한숨을 내쉴 것처럼 숨을 들이켰지만 남자의 귀가 너무 가까운 것을 보고는 아주 조심히 숨을 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의 일이라는데 한심스러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궁에 들어가기전에 사가에서 교육을 받게됩니다."
"제가요...?"
"네, 왕실의 법도를 모르실테니 간단히 교육을 받으시고 이틀 뒤 윈저 궁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


답답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정말로 눈앞이 캄캄해져 참지 못한 한숨이 터져나왔다. 뱉고나서 후회했지만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해보이질 않았다.


"제가... 뭐라고 부르나요?"
"편히 부르시지요."
"아저씨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에그시의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에 남자도 살짝 미소 지은 듯 했다. 정면에선 아무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얼굴 바로 옆에서 본 에그시는 남자의 볼이 살짝 당겨진 것을 보고 같이 미소 지었다.


"해리라고 부르십시오."
"제가 한참이나 어린것 같은데 이름으로 막 불러요?"
"그리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패밀리네임은 있을 거 아니에요. 풀네임이 뭔데요?"


 모든 질문에 가볍게 이야기 해주는 그라 그 대답역시 가볍게 대답해 줄줄 알았던 에그시는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는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하트입니다. 해리 하트."


 에그시는 눈에 띄게 몸이 굳었다. 시선은 아무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고 더러운 손이라며 그의 옷을 잡지도 못하고 주먹을 쥔 손은 그의 어깨위에서 잘게 떨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트가문.
 왕실이 윈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지금 이 나라의 실세가 하트가문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윈저보다 유서 깊은 성씨에 수세기전 실질적으로 윈저를 왕위에 오르게 한 성씨이자, 계속되는 왕실과의 혈연관계로 수세기동안 기득권을 한 번 도 놓쳐 본적이 없는, 존재만으로 법 그 자체라는 가문의 사람. 지금 에그시의 충격은 자신의 원래성씨가 윈저라는 것보다 자신이 현재 업혀 있는 사람이 하트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이 훨씬 더 컸다.


"어려워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질 않았다. 이대로 잘못하다간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하트는 그런 가문이었다.





-





 차체가 꽤나 높은 검은색 차량에 탑승 했을 때 에그시는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있었다. 새똥이 묻은 더러운 신발은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은데 그들은 왕이 신던 신발이라며, 자신이라면 가보를 넣어도 모자를 것 같은 고급스러운 함에 신발을 넣어 한 켠에 보관하는 듯 했다. 당황스러움도 신기한 것도 모두 지나가고 남은 건 불편함이었다.
 제일 불편했던 것은 차에서 내렸을 때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문앞에 나와선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왜 나와 있어요. 빨리 들어가요. 아픈 건 좀 나았어요?"
"전하께서 이리 보살펴 주시니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에그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렸을 땐 자랑스러운 아버지였고 자라서는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에게 허리를 굽히는 모습에 에그시는 눈에 띄게 얼어버린 채로 그 손을 잡고만 있었다.


"어...엄마?"
"이제 어미를 그리 부르시면 안 됩니다."
"...."
"어머니라고 부르셔야지요."


 하트가의 사람의 등에 업혀있을 때 보다 훨씬 더 숨이 막혀왔다. 왕궁은 이보다 더 할 것이다. 부모님은 더 보기 어려울 것이고 왕실은 하트가문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에그시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뒤돌아서 바로 뒤에 보이는 해리에게 말을 건넸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왕실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놀란 눈을 하고 에그시를 바라봤다. 오로지 해리만이 놀라지 않은 눈이었고 에그시의 부모님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제가 왜 왕인가요?"


 에그시의 이어진 말에 구경나온 마을사람들도 수군거리는 것을 멈췄다.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 그곳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저는 저의 부모님께서 저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싫습니다."
"왕실의 법도 입니다."
"제가 왕이 되길 원한 적이 없잖아요!"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런 말투를 쓰는 것 또한 법도가 아닙니다."
"그럼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요?"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요."
"대체 어떤 하늘이...!!"


 뒤에서 다가온 미셸이 점점 언성이 높아지려는 에그시의 손을 살짝 잡아 쥐었다. 그리곤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은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지."
"엄마..."
"그런데 내가 부족하여 아들을 왕으로 키우질 못하고 촌부로 키웠구나."
"엄마 왜 그렇게 말해요."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안 된다 에그시."
".... 난 떠나고 싶지 않아요."


 미셸은 가만히 손을 들어 에그시의 얼굴을 살짝 훑어주었다. 품안의 자식 같았던 어린 아들은 어느 샌가 장성하여 어느새 올려다 볼 정도가 되어있었다. 아이를 키운 지난세월을 모두 잊을 만큼 아이는 하루아침 사이에 달리 보였다.


"우리아들이 언제 이렇게 컸나."
"그러게. 언제나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보다도 크네."
"아버지가 작은 거예요."
"해봐야 고작 0.1~2인치정도?"


 에그시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곧게 펴며 굳이 제 아버지를 내려다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에 리역시 허리를 펴고 장난스레 키 겨루기를 하다가 이내 기침을 하곤 에그시의 어깨를 짚었다. 바로 걱정을 하며 그를 부축하는 에그시에 리는 그 손을 조심스레 뿌리치고는 해리에게 다가섰다. 마을사람들을 의식한 듯 그는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평범하게 자란 아이입니다."
"비범하게 되실 분이죠."


 그 말에 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냈다. 아무런 뒷 배경도 없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그림은 뻔했다. 꼭두각시. 이렇게 앞서 나와 있는 하트가문이나 후사도 없이 재기를 꿈꾸는 대비의 가문이 자신의 아들을 이용하는 것 그뿐일 것이다.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그것을 뿌리칠 힘이 없었다. 자신을 아들은 둔 쟁탈전을 이렇게 벌인 이상 그들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거둔 리는 다시 해리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 비범해질 준비를 우리 가족에게 줘야지 않겠습니까."
"....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오늘 밤이면 됩니다."
".... 혹시라도...."
"그럴 용기도 힘도 없으니 걱정 마시죠."


 리를 내려다보던 해리가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 하더니 뒤를 돌아 왕실의 사람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마련해둔 자신들만의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가 빠져 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해리는 기나긴 행렬의 끄트머리에 서 차에 오르며 에그시를 바라보았다. 에그시 역시 차에 오르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고 해리는 문을 잡았던 손을 놓고 자세를 바로하며 정중한 자세로 에그시에게 인사를 올렸다. 엉겁결에 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차에 오르고 있었다. 왕이라는 자가 하트가문에 마지막까지 인사를 한 셈이었다.




-




"에그시!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니가 왕이라니?"
"아, 에밀리."


 그때 에밀리의 할머니가 성급하게 쫓아오더니 기어이 에밀리의 등짝을 '짝'소리가 날정도로 강하게 후려쳤다. 그리고 그 타격이 꽤나 아팠는지 에밀리는 굽혀지지도 않는 등을 뒤로 꺾어가며 아프다고 몸을 베베 꼬았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그 모습에 에그시는 너무나 길었던 지난 하루를 다 잊을 만큼 밝게 웃어보였다.


"어디 왕에게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 거야!"


 노인의 말에 에그시의 미소가 다시 잦아들었다. 눈앞에 왕실사람들이 모두 없어졌어도 현실은 바뀌질 않았다. 담장 밖으로 멀리보이는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조금씩 흩어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몇몇의 사람들만이 에그시와 눈 마주치기 무섭게 어색한 인사를 해보이거나 무시하곤 모르는 척을 하거나 저마다의 감정을 드러내며 하나둘 사라졌다. 마을에 단 한명의 적도 없던 에그시로서는 갑작스러운 현실이 두렵고 무서울 뿐이었다.


"아, 얘가 무슨 왕이예요? 내 친구예요 친구."
"이것이 그래도 자꾸!"
"괜찮아요. 에밀리 말이 맞죠 뭐. 제가 무슨 왕 이예요."
"아이고.. 그래도 어찌...."
"말씀도 그냥 편하게 하세요. 왕은 무슨... 아까 그 사람이 왕 같지 않았어요?"
"누구?"
"그 키 큰 중년남자."
"아- 그 사람은 누구야? 귀족이야?"
"귀족이겠지. 왕실에서 나온 사람인데 어디 아무나 나왔으려고."
"귀족도 그냥 귀족이냐..."


 한숨처럼 나온 에그시의 말에 그의 부모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에밀리의 표정을 보며 에그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하트가 사람이래."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밭을 일구고 사는 이런 촌구석에서도 명망이 높은 가문의 이름.
 왕이 된 거냐며 재밌어하던 에밀리의 얼굴도 이내 어두워졌다.



-



 불이 꺼진 숙소 앞에 세워진 검은 세단. 그 안에 조명도 없이 앉아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


"네. 찾았습니다."


 차분한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는 조금은 피곤해보였다.


"네, 별다른 저항은 없었습니다."


 끼고 있던 안경을 빼며 눈가를 문지르곤 안경을 접어 옆자리에 던져버렸다.


"아직 혼인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좌석시트를 뒤로 밀어 머리를 완전히 기댔다.


"친하게 지내는 아가씨가 있어 보이지만 애틋해 보이진 않더군요."


 눈을 감은 채 성의 없게 대답을 이어갔지만 전화는 쉽게 끊기 질 않았다 .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겨우 끊어진 전화기를 손에 쥐고 가만히 의자에 깊게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런던의 하늘보다 까맣고 청명했다. 하늘에 이렇게 많은 별들이 떠있는지 자신이 살면서 단한번이라도 제대로 체감했던 적이 있을까. 오래전 런던의 하늘에서 별 하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별 지도를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아 자신이 별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기뻐했었는데, 결국 그것이 인공위성임을 알고 얼마나 침통해했는지 모른다. 가짜별 하나를 보고 자신의 이름이라도 붙여 넣어야 했나 고민했던 그 시간이 전부 퇴색되어 버렸다.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붙여 자신만 간직하고 바라봤으면 더 좋았으려나.
웨일즈의 하늘은 맑았다. 한눈에 셀 수 없는 많은 별이 떠있었고 그중 제 이름을 붙일 뻔 한 인공위성도 섞여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짜는 홀로 있을 때 진짜인체를 할 수 있지만, 진짜들의 틈에 끼어 있을 땐 존재조차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꼭두각시의 미래가 훤한 왕의 눈빛은 선했다. 흙먼지가 묻을까 자신의 어깨를 잡지 못한 그 작은 주먹에도 배려가 묻어나왔다. 아주 조금 마음을 연 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하트'라는 이름 앞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해리 하트의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그랬다. 학급의 친구들도, 군대 동기들도, 하다못해 나라의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왕의 눈빛이 바뀌는 것도 결국엔 '하트'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너뜨린 청년이 될 것이다.






3.


 다섯 시.
 조금씩 푸르스름해지는 하늘이 창밖으로 보인다. 새벽의 찬 기운이 방안에 가득했고 어렴풋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선 2~30분 내로 동이 틀 것이다. 시골의 아침은 언제나 일렀다. 딱히 늦잠을 자본적도 없지만 오늘의 이른 새벽은 에그시에겐 다른 느낌이었다. 어제 저녁 가족들과 마주 앉아 내린 결론은 자신은 결국 왕이 되어 왕궁으로 가는 것이고 부모님은 집에 남아 있다가 이따금씩 런던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부터...


"기침하셨습니까."
"네, 어머니."


 나는 왕이 된다.



-



"좀 더 어깨를 펴고 걸으십시오."
"이미 충분히 폈어요."


 무슨 걸음마배우는 애도 아니고 한여름에 걸음걸이 훈련이라니. 그의 혹독한 가르침 속에서 에그시는 땀을 뻘뻘 흘리다 너무 더운 나머지 윗옷을 벗어던지려 했고 조금 전 그마저도 '법도에 어긋난다.'며 제지당했다. 그놈의 법도, 법도... 속으로는 '이렇게 잘 알면 지가하지'라고 백번쯤 외칠 정도로 짜증이 적립됐으나 아직 생각한 바를 입으로 내 뱉을 용기는 없었다.


"집중 안하십니까."
"하고 있잖아요."


 속으로 생각하는 건데 딴생각을 하는 것은 어떻게 아는 걸까. 처음엔 중년의 신사가 제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지만 이 사람에게 짜증이 적립되다보니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짜증난다.'고 생각할 무렵 그의 큰 손이 제 뒤에서 어깨를 잡으며 뒤쪽으로 확 꺾어댔다.


"아악!!"
"이렇게 펴십시오."
"아프잖아요!"
"평소 자세가 좋지 못하셨나봅니다. 어깨가 이렇게나 굽어있으니..."
"밭일이 그렇게 만만한줄 아세요? 난 어렸을 때부터 바닥에 주저앉아서 일을 했다고요."
"학교 책상에서도 그렇게 주무셨고요."
"학교만큼 자기 좋은 환경도 없다는 건 아세요?"
"매일 주무시는데도 성적은 꽤나 괜찮으시더군요."
".... 내 성적도 조회하셨어요?"
"전하의 모든 자료가 이미 왕실에 들어갔습니다."


 에그시는 짜증이 난다는 듯 짧은 숨을 뱉으며 눈을 감고는 이마를 짚었다. 바로 뒤에선 해리는 그 행동에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아... 정말. 누가 왕 하고 싶댔나..."
"언행을 고치셔야겠습니다."
".... 이봐요. 미스터 하트."
"말씀하시지요."
"그냥 본인이 왕 하세요."
"....네?"
"뭐만 하면 고쳐라, 법도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뭐 다 아네 뭐. 게다가 명망 있는 가문에 어휴... 나 왜 시킵니까? 그냥 왕 하지 직접."


 하트가문의 사람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맨 정신일 때의 얘기지, 덥고 짜증나는 상황에선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은... 이정도로 까불면 재수 없어서라도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엎어질 문제가 아니긴 했지만...
 그리고 그런 에그시의 발언에 해리도 잠시 멍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틱틱대는 사람도 처음이거니와 제 가문의 세력을 뻔히 알면서 '직접 왕을 하라'니. 실로 대단한 강심장이 아닌가 여겨졌다. 물론 에그시는 강심장이고 뭐고 떠나서 그냥 더위를 먹은 정도겠지만.



-



왕이 된 남자
왕이 된 남자


"음식은 손으로 집으면 안 됩니다."
"... 하지만 그렇게 내미셨잖아요."



 에그시의 말에 해리는 테이블위에 놓인 작은 집게를 들어 그가 잡기 쉽도록 그 앞에 놓아주었다.


"손과 발에 티끌도 묻힐 일이 없는 고귀한분 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 고귀는 얼어 죽을 놈의 고귀야. 이것저것 따지다가 그냥 굶어죽겠네."


 에그시의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에 차가운 차를 내오던 -궁궐의 시녀로 보이는- 여인이 '풉'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바로 해리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에그시는 제 투정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줬다는 생각에 생글거리며 여전히 빵을 든 채로 해리를 올려다봤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습이 여전히 위압적이긴 했지만 경계심이나 불만스러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어딘가 비식대고 나오는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손에 든 빵은 다시 담으시지요."
"줬다가 뺐는 거예요?"
"올바른 예법으로 잡기 전까진 드실 수 없습니다."
"...말로만 왕이야. 말로만."


 에그시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손에 든 빵을 다시 해리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해리가 그 바구니를 잠시 물렸다가 다가오길 기다리며 아까 그가 내민 집게를 들어 잡았던 빵을 다시 집어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바로 손으로 그 빵을 찢으려다가 해리를 올려다보니 하는 양을 지켜보겠다며 에그시의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빵도... 포크랑 칼을 써야 돼요?"
"물론이죠."
"... 손이 편한데."
"왕실의 법도는 원래 편한 것이 기준이 아닙니다."
"그럼요? 있어 보이는 게 기준인가요?"


 에그시의 말에 해리가 기어이 숨소리가 터지는 듯 한 웃음소리를 내고 이제껏 본적 없는 미소를 잠시 띄어보였다. 그리곤 이내 따뜻한 눈을 해서는 에그시를 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있어 보이는 게 기준입니다."
"속물이네요."
"그게 귀족이죠."
"...."
"그저 백성들과 어떻게 하면 다를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고귀해보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만의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귀족과 왕실이 하는 일입니다."
"...."
"민간인들이 하는 행동은 천한 것이고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고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왔는지 미처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네, 상상이 안 되네요."
"그렇기 때문에 더 복잡하고 더 힘든 생활이 될 겁니다."
"...."
"단순히 집게로 빵을 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왕의 수업을 받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사실 식욕 이란 건 있지도 않았다. 즐거운 척을 해보았지만 그 때문에 체력은 더 급격히 소모됐다. 자신을 보는 사람이 한명도 없을 때 에그시는 표정을 지우고 공허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방금 그 해리의 말에 다시 그 표정이 튀어나와 버렸다. 우는 얼굴보단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 더 슬퍼보였다. 적어도 해리에게는...


"알고 있어요."
"...."
"이 웨일즈에서 19년을 살았던 내 인생을 이틀 만에 지우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지운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운다고 지워질 것도 아니죠."
"...."
"... 왜 잔소리 안하세요?"
"잔소리로 들리십니까."
"그럼 하신 말들이 꽃노래로 들릴 줄 아셨어요?"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이죽거리며 말을 내뱉는 에그시를 바라보며 해리는 얕은 한숨을 내쉬곤 들고 있던 바구니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를 잡아끌어 자리에 앉아 에그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두 시선에 잠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제가 한심하세요?"
"아닙니다."
"그럼... 불쌍하세요?"
"글쎄요."
"...."
"제가 그리 보는 것 같습니까. 한심하거나, 불쌍하거나."
"네."


 에그시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말에 해리가 오히려 시선을 피하며 피식 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리의 외모를 봐선 자신의 첫 혼사를 거절하지 않았다면 저만한 아들이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제 아들은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해리는 시선을 내려 식탁위에 올려둔 에그시의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살짝 그을린 다른 곳의 피부와는 다르게 그의 손목엔 손목시계의 흔적으로 보이는 하얀 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왕실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흔적이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안 좋은 버릇이 배긴 거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
"런던에 와 보신적은 있습니까."
"없어요. 평생 웨일즈에서만 살았죠. 이번 학교를 졸업하면 친구들하고 놀러가자고 했는데... 제가 친구들을 초대하게 생겼네요. 아, 친구들을 왕궁으로 초대해도 되요?"
"네, 가능하십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실 텐데요."
"그건 하트씨 얘기죠."
"..... 네, 그것도 맞는 얘기네요."


 해리는 식탁아래에 두었던 자신의 손을 들어 자세를 바로하고는 식탁위의 냅킨을 들어 그 끝을 한번 훑는 것으로 그것을 바르게 폈다. 에그시의 눈엔 그것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조금전 사진은 그 냅킨을 푸는 것만으로 반 이상을 구겨놓았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앞에도 놓인 작은 집게를 들어 바구니의 빵을 하나 꺼냈고 자신의 접시위에 놓아 칼로 반을 가르고서는 그 옆의 다른 나이프를 들어 앞쪽에 놓인 버터그릇에 손을 대지 않고 찍어내어 빵 위에 조심히 발라 한입 베어 물고는 음식을 씹으며 입가를 냅킨 끝으로 조심히 닦아냈다. 그 모든 행동이 그림 같아서 에그시는 자신의 앞에도 따뜻한 빵이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그의 행동에 매료되어 있었다.


"....자연스럽네요."


 에그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는 그저 우아하게 움직이는 해리의 행동들을 감탄하는 것 같았다.
 미쳐 말을 다 하진 못했지만 왕실에서 직접 내린 그 식기들은 자신보다는 해리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귀족 가문에서 테이블 매너는 말문이 트이고 식탁위에 혼자 앉을 수 있게 되는 때부터 배웁니다."
"그게 언젠데요?"
"3살 무렵이죠."


 자신의 과거가 어떠했나. 3살 무렵의 기억은 나질 않았다. 겨우 기억나는 4,5살 때의 단편적인 기억도 아버지와 함께 야식을 먹고 양치를 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걸 기억하세요?"
"나이를 먹고 나니 7살 이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네요. 사실 기억나는 부분마저도 희미한 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제 조카가 그 나이 대 쯤 배우더군요."
"...."


 지금 이곳에 하트가의 사람은 한사람이다. 그것도 조금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 런던은 어떤 곳일까.... 윈저보다 큰 규모의 가문. 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 자신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왕실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나를 직접 천거했다는 대비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끌어 들인 걸까.


"윈저 궁에 들어가시면 주변은 전부 그런 사람들뿐입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해리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역시 에그시의 속을 읽은 것 같았다. 떨어졌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로 바라보니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앞에 놓인 빵을 한 번 더 베어 물었다. TV속 드라마의 주인공들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느껴졌다. 고작 빵을 먹는 장면이 말이다. 어린아이의 얼굴 만했던 빵은 어느새 그의 입속으로 모두 사라졌고 그의 냅킨은 마지막으로 그 입가를 한 번 더 정리하며 식탁위에 놓였다. 그의 행동은 아무렇게나 놓은 것 같음에도 식탁위의 냅킨은 단정하게 정리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해리의 말에 그에게 다시 시선을 맞췄다. 그의 유난히 짙은 갈색눈동자를 바라보다 에그시는 어깨를 들썩이며 모르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무엄하다고 하셨어야 합니다."


 그 말에 에그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자는 방금 스스로 제가 예의 없는 행동을 했노라고 고백한 셈이었다. 그리고도 삐딱하게 앉은 자세에서 일어서지 않고 가만히 에그시를 바라보았다.


"안하십니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자신보다 나이도 많아보였고... 그리고 아직은 두려운 하트가의 사람이었다. 감히 무엄하다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무엇을.... 잘못하셨는데요?"
"...."
"제가 무엇에 화를 내야 하나요."
".... 제가 감히 전하보다 상석에 앉아 전하의 식기를 사용하며 음식을 먹었습니다."


 해리의 말에 에그시는 눈을 살짝 접으며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면 안 됩니까?"
".... 절대 안 됩니다."
"그런데 왜 하셨습니까?"


 그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밝은 미소였지만 그의 말이 무거워 해리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왜 말을 못하십니까."
"....."
"이것도 교육의 일부 입니까?"
"....네."


 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에그시의 옆에 단정하게 섰다. 에그시는 그가 일어났던 자리를 바라보며 여전히 미소 지은 채였다.


"....송구하옵니다."
"아닙니다."
"...."
"감사합니다. 좋은 교육이었어요."


 에그시를 만나고 말문이 막힌 것은 처음이었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고 화를 내야 한다고 말해주려는 순간에 에그시는 되려 미소 지었다. 그리곤 고맙다 말을 전했다. 그 밝은 미소를 가진 청년은 자신의 접시위에 놓인 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스스로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그 청년의 얼굴에선 옅은 미소가 아직 자리 잡고 있었다.


"수업시간 50분이면 쉬는 시간 10분 있는 것도 아시죠?"
".... 허기지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배가 부릅니다."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 그런데 배가 부르네요."


 자리에선 에그시는 해리의 옆을 지나쳐 나가려하는 순간 해리는 반걸음쯤 앞에서 순식간에 그 앞을 막아섰다.
 그제 서야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지금 순간은 어떤가요."
"....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무엄하다고 말해도 되는 순간인가요."
"....."


 그 말에 해리가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빗겨 섰다. 그리고 에그시는 그에게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이닝룸의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전의 교육으로 그의 걸음걸이는 예전보다 당당했지만 그 걸어 나가는 뒷모습은 쓸쓸해보였다.



-



"엄마."
"네, 전하."


 미셸의 대답에 에그시는 처진 눈을 하며 잰걸음으로 다가와선 멀거니 서있는 제 어미를 꼭 끌어안았다. 키가 더 큰 아들임에도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안겨 있는 듯 했다.


"다들 물러가라 했어요. 존대 안 해도 되요."


 품에 안겨 웅얼거리는 아들을 보며 미셸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쓸어줬다.


"이젠 사람들에게 명령도 하니?"
"말도 잘만 듣던데요 뭐."
"그렇게 힘들어?"
"....응."
"왜? 그 인간이 너 못살게 구니?"
"푸흐흐흐."
"어디 남의 귀한아들을 못 잡아먹어서 아주그냥. 엄마가 때려줄까?"
"응!"
"우리아들이 얼마나 착한데."
"때려줘. 진짜. 한 백대쯤. 나 원저궁 들어가면 가자마자 저사람 곤장 때릴까?"
"그래 확 때려버려.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려."
"근데 죄명은 뭐지?"
"우리 아들을 괴롭힌 죄."
"으하하하."



-



 잠이 오질 않았다. 2층의 테라스에 나가선 에그시는 제법 쌀쌀한 밤기운에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쳐 입고 난간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수수밭 넘어 의,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밭은 왕실의 땅이 된다고한다. 그리고 저의 부탁으로 누군가에게 땅을 빌려주어 농사를 계속 하도록 하겠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그런 것이 저에게 의미가 있을까. 휴일만 되면 밭으로 끌려가 일하는 게 싫어서 차라리 학교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투정도 이젠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낮부터 비가 온다는데 하늘은 어쩐지 아직도 청명하다. 많은 별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며 에그시는 그 모습을 담을 수만 있다면 전부 찍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저에겐 그런 장비가 없다는 것도 알았고 있다 한들 실제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웨일즈를 떠나기 전날 밤. 벌써부터 이 도시가 그리워진다.


'똑똑'

"네-"


 이 시간에 누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해리 하트...
 이젠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이틀 내내 하루 종일 붙어있던 그 남자는 윈저궁에 들어가서도 종일 함께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에그시는 그게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는 것인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들어오세요."


 에그시의 말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항상 정갈한 슈트 차림의 그가 편안한 카디건 차림으로 제 앞에 선 것은 처음 보았다. 항상 착용하고 있던 안경도 보이지 않고... 아, 손에 있구나.


"안 주무셨습니까."
"네. 잠이 안와서요."
"불이 켜져 있기에 혹시나 해서 와봤습니다."
"네..."


 방문 근처에 멀거니 서있던 그들은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에그시의 안내로 테라스에 나란히 섰다.


"그리울 것 같아요."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에그시였다.
 그리고 해리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해리는 런던에서 태어났나요?"
"네. 저희 집안사람들은 모두 런던에서 태어납니다."
"... 그럼 뭐 고향이고 뭐고 없네."
"그럴것 같지만 그래도 어릴 적 자란 곳은 기억하고, 그립고 그렇습니다."
"그래요?"


 에그시가 해리를 돌아봤을 때 해리는 저 멀찍이 보이는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장소에 대한 것보단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이나,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전 그런 것 같습니다."
"왜요?"
"... 제가 아끼던 목마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사촌동생에게 줘야 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울었거든요."
"울어요? 하트씨가요?"
"그땐 어렸으니까요. 물론 목마를 탈정도로 어리진 않았지만."
"하하하. 궁금하네요. 어린 시절 사진 없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나 런던가면 한번 보여주세요."
".... 보고 싶으십니까?"
"네. 저 하트씨랑 계속 같이 있는 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기왕이면 우리 좀 친해져요."


 친해질 수 없는 집안 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무모하고 무리한 요구를 순수하게 제안하는 그를 해리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 내가 런던에서 아는 사람은 하트씨 뿐이잖아요."
".... 대비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일찍 주무시지요."
"....대답은 안 해주시나요."
"...."
"친구 하자고요."
".... 일국의 왕은 신하와 친구가 되실 수 없습니다."


 에그시는 시선을 돌려 멀리 산등성이에 걸린 별들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와 밝은 별이 빛나는 하늘아래 그저 자신만 홀로 서있는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해리."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해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한텐 친구가 필요해요."


 이미 젖어 버린듯한 그의 목소리에 해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잠깐이면 되잖아요."


 자신의 운명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리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왕실의 꼭두각시가 되기엔 아까운 청년이었다. 그리고... 대비의 사람이 아닌 하트가의 사람으로 만든다면 훨씬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네."
"친구가 되어 드릴 순 없지만..."
"....네."
"전하의 사람이 되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네?"


해리는 그를 향해 가만히 미소지어보였다.





4.



'우르릉 쾅!!'


 날씨가 그냥 궂은 정도가 아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아침부터 하늘은 번쩍거리고 대문 앞에 대기한 마차의 말들은 벼락이 칠 때마다 '히이잉'하는 소리를 내며 불안에 떨었다.


"그래, 나도 나가기 싫은데 너넨 오죽하겠냐."


 에그시는 창밖으로 보이는 말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물론 그 앞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의전을 갖춰야 한다며 여러 겹의 옷을 차례로 입혀주는 궁인들을 두고 잘도 '나가기 싫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바로 해리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많으니 말을 조심하라는 무언의 신호. 모를 리 없지만 모른 척 하고 싶었다.

 가슴에 정체도 모를 여러 개의 무거운 배지를 달고 붉은 허리띠를 매고 손을 들어 하얀 장갑까지 씌워줬다. 그리고 자신은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긴 장검을 허리에 매어주곤 모든이 들이 한걸음 물러섰다. 자신의 손을 시작으로 팔과 신발, 옷가지들을 내려다본 에그시는 허리춤에 매인 검의 손잡이를 살짝 매만지며 제 부모를 향해 바로 섰다. 아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그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눈에도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 보였는지 모른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한 의복으로 하얗고 고운 에그시의 피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어깨 금장의 빛을 받은 올리브색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한 번도 신어본적이 없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정장구두가 그의 매끈한 몸을 지탱하고서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탄스러웠다.

"저, 잘 어울리나요?"

 부모님의 대답보다 해리의 헛기침 소리가 먼저 나왔다.
 에그시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짐하듯 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내었다.


"잘... 어울립니까."
"네. 아주 훤칠하십니다."
"처음부터 전하를 위한 의복이었던 듯 보입니다."


 과연 이 대화를 어느 누가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라 볼 수 있을까. 에그시는 부모님이 서계신 쪽으로 한걸음 떼다 바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에그시와 그의 부모를 번갈아 보던 해리는 주변에 서있는 궁인들에게 사인을 보내 모두 뒤돌아 그를 보지 못하도록 돌려세웠다.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돌린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서야 에그시는 제 부모님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고 그 걸음마다 이어지는 짤그락 소리가 멈춘 것이 그들이 서로 부둥켜안았음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친근한 표현이나 자식을 향한 하대는 불가 했으므로 셋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당분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한 번 더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되어 부둥켜안고 있던 셋은 몸을 뗐다. 그리고 왕실 의사의 치료 덕인지 안색이 조금은 밝아진 리는 에그시의 손을 잡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힘들면 못하겠다고 하고 돌아와 버려."
"... 그냥 안가면 안 되겠죠?"


 끝까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에그시에 리와 미셸의 표정이 밝아졌다.


"더 이상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해리의 목소리에 에그시의 몸이 부모님에게서 완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무거운 의장 때문에 허리를 힘주어 펴기도 전에 부모의 허리숙인 인사를 받았다. 왕이 된 그는 굽어진 부모의 허리를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그들에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뒤돌아서 문을 나섰다.


 집의 현관부터 대문을 거쳐 금장을 한 마차의 문까지 빨간 카펫이 깔려있었고 그 양옆으론 왕실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몇 겹으로 서있었다. 그 모습마저 장관이라 동네사람들은 이번에도 저마다 골목으로 나와 구경을 하고 있었고 카메라와 핸드폰이 있는 자는 간간히 현장을 찍기도 했다. 그들 사이로 커다란 카메라가 보이는 것을 봐서는 기자들도 그들 틈에 섞인 듯 했다. (전날 해리는 인터뷰는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 했다.) 그들을 살피던 에그시는 이웃집 2층에 난간에 걸터앉은 에밀리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손이라도 흔들 뻔 했다가 이내 살짝 미소 짓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미소를 본 에밀리는 감히 왕에게 혓바닥을 내보이는 장난 짓을 했고 그 행동 덕에 에그시는 기록으로 남을 만큼의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때의 그 미소는 '웨일즈의 아름다운 청년, 왕이 되다.' 라는 타이틀로 일간지 1면을 차지하기도 했다.



-



"꼭 마차를 타야 되는 거예요?"


 에그시의 말투에 해리가 또 차가운 눈을 하고 마주보았다. 지금 이 마차 안엔 정방향으로 앉은 윈저가문의 왕 에그시와 역방향으로 앉은 하트가문의 해리 둘뿐이었다.


"알았어요. 도끼눈을 뜰 건 뭐람."
"평소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언제든 문제가 됩니다."
"네네. 그러시겠죠...."
"...."
"흠흠. 꼭 마차를 타야 하는 겁니까?"
"불편하십니까."
"네. 게다가... 의외로 엉덩이가 배기네요."


 느닷없는 후기였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해리의 표정은 조금 망가져버렸고 에그시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눈을 마주친 채로 살짝 웃어보였다 .


"귀하신 분인데 딱딱한 마차의 의자에 앉히게 되어 송구합니다."


 해리의 말은 묘하게 비꼬아져있었다. '귀하신 분'이라는 부분과 '딱딱한 마차'라는 부분이 그랬다. 웨일즈에서 오는 제가 그리 귀할 리 없었고, 마차의 의자엔 그 아래에 콩을 넣어놨어도 모를 정도의 푹신한 쿠션으로 마감처리 되어 있었다.


"네, 제가 귀~해서 이런 걸 잘~ 느끼나 봅니다."


 에그시의 이죽거리는 말에 해리가 결국 이빨을 보이며 미소 지어 버렸다. 보면 볼 수록 재미있고 밝은 청년이었다.


"불편하신다면 차량으로 옮겨도 되지만 왕실의 ..."
"법도가 그렇지 않겠죠. 니예니예."


 마지막에 축 처진 입모양을 해서 싱겁다는 듯 뱉은 말엔 해리의 눈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꼰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표현은 꼭 왕실의 법도가 아니어도 눈에 거슬릴 정도였다.


"제가 편할 구석이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
"그걸 해리라고 해두죠."
"제가 편하십니까?"
"음... 아직은 별로요."
"그런데 저를 두고 편할 구석이라고 하십니까."
"글쎄요... 런던에 도착하면 가장 편할 구석 아닐까요? 전 지하철도 타본 적이 없다고요."
"오, 그건 저도 타본 적이 없습니다."
"..... 귀~하신 분이 역방향으로 앉으셨네요. 자리 바꿔드릴까요?"


 에그시가 자리를 바꿔줄듯이 반쯤 일어나는 행동을 취하자 갑자기 막차가 속도를 줄이며 해리의 옆자리로 무전이 울렸다.


[세울까요?]


 오. 마이. 갓. 에그시의 머릿속엔 딱 3단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멍한 표정을 보고 해리가 눈짓으로 '어쩔거냐'고 물어오자 에그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냥 가라고 손짓했다.


"전하께서 자리가 불편하시어 잠시 움직이셨을 뿐이니 바로 출발하지."
[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다시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내고 있었고 에그시는 자신의 뒤쪽에 나있는 창문으로 그 뒤를 따르는 행렬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탄 마차가 멈춘 탓에 거대한 행렬이 한번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는 그림이 장관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교통체증의 한 중간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한 에그시는 눈썹을 위로 들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도 마음대로 못 친다는 생각에 꾹 다물어진 입술이 한쪽으로 비뚤어졌다. 그리고 그 표정을 잠시 넋을 놓고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해리의 표정도... 하트가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자못 대단했다.




-



 창밖으로 'LONDON'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얼마 안 되서 멀리 보였던 높은 건물들이 제 주변을 둘러쌓았다. 교통체증으로 유명하다는 도시는 왕실의 행차에 쥐새끼 한 마리 그 앞을 가로막지 않았고 간간히 보이기 시작하는 시민들은 저마다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는 그들이 웃는 모습이 보였지만 에그시는 그 인사에 답을 해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안절부절 하지 못해 자신의 의전만 구깃거리며 잡고 있었다.


"지금은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그 순간 에그시는 불안한 눈빛으로 해리를 바라보며 정말 제 속을 잘도 읽어낸다는 생각에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그에게 뭐라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템즈강을 건너면 버킹검 궁까지 가는 길에 전하의 환송을 축하하는 시민들이 모여 있을 겁니다."
".... 저를요..?"
"그럼요. 오는 길에 정신이 없으셔서 볼 생각도 못하신 것 같지만...."


 해리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몇 번 두드려 어떤 화면을 열더니 바로 에그시에게 내밀었다.


"으악!"


자기 얼굴을 보고 저런 감탄사를 뱉는 것이 영락없는 고등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예요?"
"전하의 즉위를 축하하는 기사죠."
"아니 이사진이요. 언제 찍은거야. 왜 이렇게 바보같이 나온걸. ..... 으아아아!! 이게 메인뉴스예요?!!!"


 감정이 이렇게까지 오락가락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어려서 가능한 걸까? 밝게 웃다가, 무겁게 분위기를 잡다가, 때론 눈물지으며 슬퍼하다가... 이젠 자기 사진을 보고 목까지 벌게져선 자신의 핸드폰에 코를 박을 기세로 훑어보고 있다.


"아... 해리가 인터뷰 했어요?"
"...네? 저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에그시가 다시 내민 핸드폰엔 해리가 내민 것과는 전혀 다른 기사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새로운 왕을 봉영하는데 앞선 해리 하트는 영국 제1의 귀족 하트가문은 새로운 왕께 적극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며 수백 년 간 이어져온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라는 글귀. 자신이 말한 것처럼 되어있지만 요 며칠간 해리는 기자를 만난 적도 본적도 없었다. 틀림없이 가문에서 힘을 쓴 것이었다. 국민들이 두려워하는 그 가문이 왕실에 충성을 한다는 거짓 아닌 거짓으로 환심을 사려는 행태... 해리는 가만히 홈버튼을 눌러 화면을 꺼버렸다.


".... 제가 한말은 아니지만..."
"나쁜 말도 아닌데요 뭐. 충성을 다 하신다구요?"


 다시 방긋방긋 웃어 보이는 에그시를 보며 해리는 바로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가문의 저의가 뻔했지만 이 똑똑한 청년이 그것을 모를 리도 없고 저도 그것을 모른 채 할 생각도 없었다.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진입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무전소리에 해리와 에그시가 자세를 바로 했고 창밖으로 조금씩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며 해리가 창 옆의 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마차의 작은 창문이 옆으로 펼쳐지며 조금 크게 열렸고 마차를 비롯해 다른 행렬들이 속도를 줄여 시민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십시오."
"자연스럽게요..."
"본인이 정말 고귀 하다는 걸 보이세요."
"... 제가요...?"
"위에 서있는 사람만이 아래를 굽어볼 수 있습니다."
"...."
"그들의 위에 서세요. 단 한순간에."
"... 어떻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
"나는 너희들보다 우수하다. 너희들 보다 뛰어나다."
"...재수없네요. 겸손할 수는 없는 건가요?"
"겸손해야 할 만큼 대단하지 않을 땐 겸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필요이상의 겸손은 전하께서 군림하기도 전에 짓밟히게 만들 명분만 될 겁니다."


 에그시는 강한어조로 말하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 단호하게 다물어진 입매를 보고야 살짝 한숨을 내쉬며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사람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죠."
".... 전하께서 하시는걸 봐서요."
"말 바꾸지 마세요."
"...."
"지금 제가 믿을 사람은 해리뿐이니까."


 그를 향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



 에그시는 상상도 못할 규모로 자신을 위압하는 버킹엄궁전 내부의 모든 위용에 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에 정신이 없었다. TV드라마는 애들 장난이구나 싶을 정도로 높은 천장과 그 천장을 받치는 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림까지... 고개를 가볍게 굴리지 말라는 해리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벌써 이 방을 몇 번이나 둘러보며 이것저것 재잘거렸을 것이다. 아니, 그 조언이 아니었다 해도 그런 행동은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커튼이 장식된 테라스의 커다란 창문 넘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이 낮은 웅성거림으로 느껴졌다.


 왕위 즉위식.
 정신 차리자, 괜찮아, 그냥 웃어 보이면 돼. 괜찮아. 괜찮을 거야.
 몇 번이나 마음을 가다듬으며 심호흡을 하는 동안 궁안의 시녀들이 새로운 의복을 차려와 그의 옆에 섰고 그들이 준비를 마친 것을 보고서야 해리가 제 옆에서 손짓으로 가볍게 신호를 줬다. 이미 단단히 갖춰 입은 상태였지만 그들은 다시 에그시의 곁을 둘러싸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에 찬 끈을 바꿔 끼우고 먼지 한 올 묻지 않았을 것 같은 그의 손끝을 닦아 내렸다. 그녀들의 손길이 제 몸에 스쳐 평소라면 간지럽다며 민망해 할 법도 했지만 에그시는 지금 그럴 정신이 없었다.
 해리의 눈엔 최소... 큰 사고를 저지른 평범한 학생이 교무실에 끌려가기 직전, 답지 않은 유서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한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에그시는 파르르 떨며 감았던 눈을 조심히 떴다. 해리는 방으로 들어왔던 문을 열며 자신을 인도했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테라스는 점점 더 멀어졌다. 이젠 어딜 향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궁금하다 물어볼 기운도 나질 않았다.



-


 버킹엄 궁 가장 안쪽의 커다란 홀이 커다란 문 넘어로 보이는 듯 했다.
 이 문이 열리면 그대로 길이 끝나는 곳 까지 걸어가야 한다. 발목을 삐끗하면 어쩌지? 길이 안보이면 어쩌지? 사람들이 날 한심해 여기면 어쩌지?


"전하."


 해리의 부름에 에그시가 매우 느린 속도로 조금 뒤에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들은 귀신입니다."
"..네?"
"전하의 걸음걸이만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것만 봐도 되다니요? 뭐가요?"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
"이틀 전만해도 걸음을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왠 걸음걸이를 배우냐 생각 하셨었죠."
"...네."
"저 귀신들을 잡아 먹으라 알려드린 것입니다."
".... 다 까먹었어요. 생각도 안나요..."
"어깨가 아팠던 것은 기억하시죠?"
"아,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어깨 빠지는 줄 알았네."
"제가 여기서 그걸 한 번 더 보여드릴 필요는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그거 음... 완전 비둘기 같은데."
"비둘기보다는 공작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공작이요?"
"날개를 펼친 우아한 공작이라고 생각해보시지요."
".... 하... 저 넘어지면 어쩌죠?"
"제가 뒤에 있습니다."
"...."
"전하께서 발목을 비끗하게 되더라도 제가 잡아드릴 것이고 제가 있는 이상 전하의 실수를 책망할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급하지 않으니 느리게 가십시오. 제가 있는 한 전하의 옥수가 땅을 짚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아, 그거 좀 오글."
"...네?"
"옥수 어우... 진짜 오글... 어우.. 그거 하지마세요. 아 소름."


 긴장이 풀린 것인지 또 제 팔을 쓸어내리는 에그시를 보며 해리는 숨소리 같은 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밝게 웃으려는 에그시의 뒤로 관악기의 나팔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긴장을 집어삼킨 에그시의 앞에 천장에 다다르는 커다란 문이 삐그덕 하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해리의 말대로 그 안엔 귀신들이 가득했다.


 처음 몇 걸음은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왕관을 든 채로 서있는 주교가 보였고, 그 다음으로는 제가 왕관을 쓴 채로 앉아야하는 커다란 붉은 의자가 보였다. 까마득한 그곳이 조금씩 가까워져 오자 그 다음엔 주위에 구름같이 모여 있는 영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보였다. 모두가 어찌나 한껏 꾸며댄 것인지 어떤 자는 왕의 복식을 입은 저보다도 화려해보였다. 그 저마다의 힘을 과시하는 그들의 행태가 그림과 같아서 에그시는 이내 굳어진 얼굴을 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저는 그것이 조금 웃겼을 뿐이지만 그 즉위식이 방송을 타고 나갈 땐 '여유롭게 미소 지어 보이는 군주'라는 자막이 나갔음은 그 후에나 알게 된 사실 이었다.


 결코 다다르지 않을 것 같은 대주교의 앞에 서서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주교는 에그시의 머리위로 성수 몇 방울을 뿌리고는 자신을 향해 기도해주었다. 뭐 중요한 말이었겠지만 그마저도 에그시의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머리위로 무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그 무게를 견디라는 명언으로 더 유명한. 영국왕실의 왕관이었다.


"대영제국만세!!"


 등 뒤로 울려 퍼지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우렁차 기분이 묘했다. 초반엔 충성경쟁을 할 것이라는 해리의 조언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



 버킹엄궁의 응접실은 제 집보다 높고 화려했다. 이런 공간이 그냥 한 '방'이라니. 에그시는 그제야 긴장을 조금 푼 모습으로 테이블 앞의 소파에 편히 앉아있었다. 조금 전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돌아서 들어오며 어지럼증에 잠시 주저앉았으나 이내 왕실의 주치의가 건네는 피로회복제 비슷한 것을 마시고 약간은 기운을 차린 상태였다. 하루가 길어도 정말 너무 길었다.


"선 왕비마마 드십니다."


 에그시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옆에선 해리가 그의 어깨를 살짝 잡는 것으로 일어나지 않게 했다. 조금 전에도 대충 아무 곳에나 앉으려던 에그시를 해리가 직접 상석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선 선대왕비는 앉아서 자신을 맞는 에그시에 조금은 놀란듯했고 그 뒤에 선 해리에겐 찰나의 적대감을 표했다. 둘의 가문이 절대 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에그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자기보다 연배가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는 데 이렇게 앉아서 맞이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가득했을 뿐이다.


"인사 올립니다. 전하."
"네. 처음 뵙겠습니다. 대비마마."
"아침 일찍 오시는 길은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왕실에서 오신 분들이 모두 잘해주시어 편히 왔습니다."
"하트가문의 사람들이 일을 아주 잘하지요. 명불허전입니다."
"네.... 그.. 친절히 보살펴 주었습니다."
"전하께서 보살피는 것이지 어찌 신하가 보살폈다 말씀하십니까."
"....아, 그런가요. 하하..."


 아직 제 옆에선 해리를 곁눈으로 살짝 올려다봤지만 그는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자네는 이만 물러가있게."


 에그시는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저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긴 했으나 이제 고작 2~30대로 밖에 보이질 않는 여인이 최소 40은 먹었을 것 같은 해리에게 분명하게 하대를 하며 말을 건넸다. 왕실의 법도상 손윗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하트가문의 사람인데 이리 대해도 되는 것인가 의심스러울 때 해리가 목례를 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물러가 있으라하지 않는가."
"전하께서 하명하시기 전까진 다섯 보 이상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해하시지요."


 그 말에 대비는 바로 에그시를 바라보았고 조금 전까지 겨우 안정을 찾은 에그시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대비와 해리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전하."
"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염려 마시고 10분정도만 시간을 내어주시지요."
"네? 아..네.."


 여전히 망설이는 듯 한 에그시를 보며 대비는 이제껏 보지 못한 인자한 미소를 띄며 에그시의 눈을 바로보고자 몸을 내밀었다.


"전하. 전하를 이 자리에 앉히고자 한 것이 바로 접니다. 제가 혹여 전하를 해치겠습니까. 지금 왕실에선 제가 전하의 어미가 되는 것을요."


 그 말에 에그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것은 해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였다. 시선을 올려 해리를 바라보자 그 역시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듯 놀란 눈을 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뭔가 사단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에그시는 겨우 입을 떼었다.


"하트. 잠시 물러나 있어도 좋습니다. 대비마마께서 말씀을 다 하시거든 바로 부르겠습니다."
"네. 그럼.."
"전하. 어찌 신하에게 그리 존대를 하신단 말입니까."


 해리가 걸어 나가는 중에도 대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말씀을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네... 아직, 익숙하질 않아서..."
"익숙해지셔야지요."


 그 말을 기점으로 해리는 완전히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하트가문의 사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비의 목소리도 바뀌었다. 조금 전 가식적이고 해리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아닌 정말로 자신을 위하는 친구 같은 목소리.


"하지만... 잘 대해줍니다."
"물론이지요. 저들은 전하를 잡아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할 겁니다."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직 혼사를 치루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네? 저 이제 고등학생입니다. 물론 몇 달 뒤에 졸업을 하긴 하지만... 아직은..."
"제가 전하께 힘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어..어떻게 말입니까..."
"저희 해스캣 가문과 윈저가문이 손을 잡아야만 하트가문의 기득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 저는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모르셔도 됩니다."
"....."
"일단 제 말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전하를 호위 한다는 저자는 반드시 전하를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속으로 당신은 아니냐며 말하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에그시는 그 말을 입으로 뱉지 않았다.


"전하께 좋은 배필을 찾아드릴 것입니다."


 아마 시골집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냐'며 '연애 백번도 더하고 죽을 거'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그런 투정을 받아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형질은 발현하셨습니까?"
"...네???"






5.



 간밤을 꼬박 새었다.
 입궁을 하던 날 아침부터 움직여 오후 넘어 부턴 피곤이 태산처럼 밀려와 해만 떨어지면 골아떨어지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시뻘건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했다. 전날 대비를 만난 것이 제일 큰 화근이었다.



"형질..이요??"
"네. 혹시 아직 모르십니까."
"네 저는..."
"하... 자당께서 그런 교육을 안하 신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을 요악하자면 그랬다. 왕실과 귀족들만이 갖는 평민과의 다른 점이 하나 있다고. 알파와 오메가??? 이게 무슨 화학기호도 아니고... 그리고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남성 형 오메가나 여성 형 알파가 존재하고 그 성기능이 어쩌고....
 그 대목부터는 에그시는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비가 무슨 말을 하고 나갔는지는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해리를 부르기 전에 대비가 인사를 하고 나갔고 저는 그냥 멍청한 얼굴을 하고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대비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해리는 서둘러 응접실 안으로 발을 옮겼고 그 안에 앉은 자세 그대로 석상이라도 된 듯 입을 반쯤 벌리고 굳어있는 에그시를 볼 수 있었다. 대체 대비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넌지시 질문을 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내뱉어진 에그시의 말이 가관이었다.


"해리....해리는 뭐예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알...알파예요, 오메가예요?"


 그 말에 해리는 저 역시 에그시처럼 반쯤 벌어진 입을 하고 놀란 눈을 했다가 바로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으로 자라 알 수 없을 것이 뻔한데 왕실의 어미라는 것을 강조한 대비는 거의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말을 뱉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알파든 오메가든 발현을 하게 된다면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뭔데요."


 물론 에그시는 자신의 궁금증을 지금당장 해소하고 싶어 했고 해리는 별 수 없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파입니다."
"....저도 알파일까요."
".... 왕실의 권위에는 그 어떤 것이 발현되더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시 마시고..."
"우리아빠는 뭐지?"
"전하..."
"해리는 알아요?"
"네..."
"어떻게요. 아버지가 그런 말도 해주시던가요?"
".... 형질이 발현되고 나면 서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뭐예요?"
"대원군께 직접 물어보시지요."


 에그시는 그런 말을 제 아버지께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오나 전하."
"네.."
"대비께서 왜 그런 말씀을 꺼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혼사 문제라면서..."
"그렇다 해도 상대에게 함부로 형질을 물어보거나 관련한 질문을 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아..."
"전하께서 신에게 하신 것은 절대 그런 의도가 없으므로 괜찮습니다만..."
"그게 근데 왜 실례예요?"
"....전하는 친구들과 야한농담을 하실 때 성적취향도 자세히 공개하곤 하시나요?"
"네????"
"이런 자세가 좋다, 저런 플레이가 좋다."


 그 말에 에그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얼굴을 붉혔다.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거라 생각하십시오."


 해리의 마지막 말에 에그시는 입술을 깨물듯이 다물었다. 자신의 성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릴 지경이었고 이런 것을 귀족의 신분으로 타고난다는 것이 기가 막히게 절묘해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속으론 어찌됐든 알파이기만을 희망해봤다. 뭐 그런 고민들도 왕실 주치의를 만나면서 다 까먹어버렸지만.


"아직 안 드러나셨군요."
".... 네."
"부부인께서도 귀족의 혈통이라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그럼..."
"네. 하지만 평민들 사이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강하게 발현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주변의 영향을 받습니다. 주변에 베타들의 수가 더 많으면 발현이 안 되거나 열성이 될 수도 있지요."
"...."
"전하께서도 평민 친구들이 많으셨기에 발현을 안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발현을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 전하의 표정으로 볼 때 매우 달가워하지 않으시는 듯하지만.... 왕궁에 들어온 이상 시간문제입니다."


 주치의의 말에 에그시는 벌어졌던 입을 다물며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에그시에게 한마디 더 해지기를 열성이 될지 우성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밤을 새었다.
 분명 전날저녁 새로운 학교로 전학준비를 해야 하니 일찍 자라는 해리의 말을 들었음에도 에그시는 '전학'이라는 키워드보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해리에게 '당신인 우성이냐 열성이냐'를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예의가 아니라기에 묻지도 못하고 인터넷을 뒤지며 관련 정보를 찾아내기 급급했다. 물론... 왕실이나 귀족들에게만 발현되는 것이라 정보가 많지도 않았다.



-



 벌건 눈을 하고 아침부터 검은 세단에 올라타 어디론가 향한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에그시는 제 주변의 풍경이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조금은 부산 스럽다 싶을 정도로 두리번거리니 앞좌석에 앉은 해리가 말을 이었다.


"이튼스쿨입니다."
"네?"
"전하께서 다니실 학교입니다."
"....저...저요? 제가요? 여기 아무나 못가는..."
"아무나가 아니죠. 대영제국의 전하이십니다."


 아마 운전수만 따로 없었어도 에그시는 해리에게 한번이라도 더 이죽거려 봤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엔 좀 피곤하기도 했지만.



-



 단 한 번도 학교를 다니면서 '교장실'이라는 곳에 들러본 적이 없었다. 학업성적이 1위를 할 정도로 우수했던 것도 아니고 말썽을 일진급으로 피워본 적도 없이 그냥 저냥 학교를 잘 다닌 저로써는 '교장실'이라는 장소조차 어색했다. 그것도 이튼스쿨에...


"오시었습니까."


 존댓말까지. 에그시는 티 나게 숨을 내뱉고는 정말 밝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교장선생님."
"네. 전하."
"제가 이곳에 학생이 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말씀 편하게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하지만 법도가..."
".... 저한테 모든 선생님들이 존대를 하시면... 저 자연스럽게 왕따가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교장은 말꼬리를 늘이며 에그시의 뒤에 있는 해리를 바라봤다. 그는 안경을 살짝 올려 쓰며 에그시를 바라보곤 교장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럼... 다른 선생들에게도 전해주겠..네.."


 툭툭 끊어지며 어색한 존대를 해오는 교장을 보며 에그시는 여느 학생이나 다를 바 없는 미소를 띠었다.


"그냥 다른 학생들하고 똑같이 해주세요."


 뒤에선 해리는 시선을 돌리며 들리지도 않을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교장은 그 둘의 눈치를 보고는 에그시를 상석에 앉혀 -이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해리가 만류했다- 간단한 교내 규칙과 수업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가는 것 역시 가관이었다. 가는 길마다 자신을 알아보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아주어야 했고 교무실로 들어 갔을 땐 거의 모두의 '예'를 받을 뻔했다.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여 겨우 그들을 말렸고 교실 한 중앙에 섬처럼 자리 잡은 그에게 몇 시간동안은 암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조금 심심해져 올 때쯤.... 에그시는 차라리 '그냥 편한대로 존대를 하라'고 했어야 했나 잠깐 고민했다.


"안녕."


 저를 향한 인사인가? 고개를 숙인 채 책을 읽던 에그시는 소리가 나는 정면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을 맞춰오는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 틀림없이 저를 향하고 있다.


"인사를 했으면 받아줘야지."
"어, 아... 안녕."
"에그시? 에그시라고 불러도 되지?"
"으응."
"난 찰리. 찰리 해스캣."


 내밀어진 큰손을 엉겁결에 마주 잡았다. 해스캣...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제 하도 많은 귀족들의 성씨를 들은 터라 에그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니가 직접 말 편하게 하라고 했다."
"어? 응. 편하게 해."
"근데 왜 눈살을 찌푸려."
"아니, 생각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
"....아니야. 아무것도."


 이 짙은 푸른색 눈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였지...


"아직 약속 없으면 점심 같이 먹을래?"
"응. 그래. 약속 같은거 없어."
"그럼 나가서 먹자. 오늘 식당메뉴 형편없어."
"그래? 이튼스쿨 식당메뉴 좋기로 유명하지 않아?"
"거지같기로 유명하겠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찰리를 보며 에그시는 숨소리 같은 웃음을 뱉었다.




-




"학교에선 별일 없으셨습니까."
"하...해리."


학교 정문에 세워진 세단을 보고 에그시는 티가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 꼭 이거 타고 다녀야해요? 저기 보세요. 다른 학생들은 그냥 버스타고..."


 라며 주위를 가리키는데 교문 밖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학생들은 몇 되지 않았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생주차장으로 이동해 자기차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 유일하게 친근감을 표현했던 찰리역시 뚜껑이 열리는 멋진 스포츠카를 끌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손을 번쩍 들어 에그시에게 눈에 띄게 인사를 해보였다.
 그리고 그 '법도에 어긋나는' 버릇없는 행동에 해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안경을 살짝 올려썼다.


"타요."


 상황파악을 끝낸 것인지 에그시는 해리보다 먼저 차에 올랐고 해리역시 주변을 조금 더 살피다가 차에 올랐다.


"아까 그 학생은 누구 입니까?"
"누구요?"
"전하께 손을 들어 인사를 하던 학생 말입니다."
"아, 찰리요. 저랑 수업이 많이 겹치더라고요."
"어느 가문의 사람입니까?"
".... 해리는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
"이튼스쿨 다니는데 좋은 가문이겠죠. 별 걱정 이십니다."



-



"그래. 학교에서는 좀 어떠하든?"
"순진하던데요? 시골에서 자란 느낌이 온몸에서 묻어 나오더라고요. 게다가 교내에서 존댓말 금지 명령을 했어요."
"뭐? 왕이 직접?"
"네. 애들이 전부 다 당황했다니까요. 오히려 그러니까 더 어려워서 아무도 다가가질 못하죠. 괜히 반말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까봐. 근데 몇 시간 두고 보니까... 전혀 그럴 사람으로는 안보이더라고요."
"그래. 아주... 순진해보이긴 했다."
"그나저나 향기가 안 나던데...."
"발현을 안했다더구나."
"마마께서 직접 물어보셨어요?"
"훗. 그래."


 찰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왕에게 직접이요?"
"응."
"그걸 하트가 두고 보던가요?"
"그러기 전에 먼저 나가보라고 했지."
"와.... 우리 고모님도 정말 대~단 하십니다."
"그 멍청해지는 얼굴을 너도 봤으면 참 좋은데 말이다."
"그나저나 주치의는 뭐랍니까? 어느 쪽에 가능성이 있대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더구나. 성질이 너무 안 비쳐서 열성이 될 거라는 말도 했고."


 대비는 손에든 홍차를 살짝 홀짝이며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네가 좀 더 붙어있으면 언제라도 발현되지 않겠니?"
"너무 열성이면 저도 소용없을 걸요?"
"나도 자주 만날 테니 네가 걱정할 것이 없다."
"오, 우성오메가와 우성알파가 계속 자극을 주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일단 형질이 발현되어야 혼사를 치뤄도 치를게 아니니."
"어느 쪽이든 열성이 된다면 우리가문 버텨내긴 힘들 텐데요."
"버텨내라고 세운 자리는 아니잖니."


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버킹엄궁에서 모든 행사를 마친 뒤 윈저궁으로 들어 온지 몇 일이 지났지만 제 방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공주님처럼 장막이 쳐진 침대하며 먼지가 쌓이기 딱 좋은 물결무늬로 마감된 가구, 당장에라도 천사가 강림 할 것 같은 천장의 그림까지... 이런 질 좋은 이불과 푹신한 침대라면 한낮에도 잠들 수 있어야 할 텐데 에그시는 몇 일째 제시간에 잠이 들질 못했다. 괜찮은 척 포장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불을 켜고 있으면 누군가 올라와 무엇이 불편하냐며 물어볼 것이 뻔해 에그시는 불부터 끄고 해리 몰래 장만한 핸드폰을 열어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한참의 신호 끝에 잠에서 막 깬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엄마."
[에그시? 에그시니?]
"응. 엄마."
[아, 아니지. 전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엄마. 말 편하게 해요."
[어찌 전하께 말을 놓겠습니까.]
"이거 왕실에서 준 휴대폰 아니예요. 따로 장만했어요."
[...정말?]
"응. 사실 왕실에서 제공한 것들 좀 불안해서... 새로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었는데 왕실은 다 도청하고 감시한다잖아요."
[정말 그러니?]
"그거야 모르죠. 몰래하는 것들인데. 그래서 그 친구가 몰래 하나 장만해줬어요."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러다가 걸리면..]
"안 걸릴려고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거죠. 아빠는요?"
[지금 옆에서 자고 있다. 깨워줄까?]
"아니에요. 몸은 좀 나았어요?"
[그래. 몇 번 도시로 나가서 치료받더니 지금은 꽤 괜찮은 편이야. 너는?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응..."


 엄마의 평범한 건강 걱정에 에그시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꺼내야마나 여러번 고민했다. 그리고 제어머니가 그런 것을 모를 사람도 아니었다.


[무슨 일 있구나. 왜 그래.]
"아니에요. 일은 무슨..."
[근데 이렇게 비 맞은 강아지마냥 우물쭈물 거려?]
"엄마 그... 있잖아요."
[그래. 말해.]
".... 아니에요. 그냥 잘 지내나 궁금했어요."
[너, 바른대로 말 안하면 혼난다.]
"엄마, 이 나라에서 나 아무도 못 혼내요."
[내가 내 아들 혼낸다는데 누가 그래.]
"....엄마."
[응. 아들]
"하... 엄마 보고 싶다."
[그래. 나도 아들 보고 싶어.]


 그때 방문 밖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누가 온다. 전화 끊을게요."
[그래. 전화 자주하고.]
"네. 잘 자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네-"
"아직 안 주무십니까."


 중년 남성의 목소리. 자신을 찾아오는 자가 많지 않으니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네, 들어오세요."


 조심히 문이 열리고 창밖에서 내려오는 달빛에 그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불이 꺼진 듯 한데 말소리가 들려서 올라와봤습니다."


 저런 귀신같은 인간. 제발 관심 좀 끄지.


"아 그냥 심심해서 혼자 중얼거렸어요."
"...혼자요?"
"네. 잠도 안 오고..."


 해리는 침대에 걸터앉은 에그시를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숨기는 듯 했지만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잠시 불을 켜도 되겠습니까."
"네, 뭐..."


 해리는 불을 켜고 에그시가 갑자기 켜진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침대 근처의 테이블로 다가와 섰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해리가 테이블의 한 켠에 앉자 에그시도 침대에만 걸터 앉아있는 것은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의 맞은편 자리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아직 힘드십니까?"
"네?"


 해리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왜 아직 안자는 거냐고 잔소리를 하거나 왕실의 법도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늘어 놓을줄 알았는데 그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왜요?"
"몇 일째... 잘 못 주무시지 않습니까."
".... 그걸 해리가 어떻게 알아요?"
"....."
"아, 잠깐. 그걸 해리가 어떻게 알아요?"
"저는 전하의 안위를 최측근에서 보위하는 사람으로서..."
"아니요. 아니요. 잠깐만요. 내가 잠을 못 자는 건 맞는데.... 난 지금 몇 일째 불은 일찍 끄고 있거든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해리를 보고 에그시는 갑자기 소름끼치는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안의 구석이나 액자의 뒷면 등등... 몰래카메라가 있다면 당장 찾아내서 이번에야 비로소 혼쭐을 내줘야겠다며 속으로 백번도 더 생각했다.


"CCTV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에그시의 행동이 뻔해 해리가 먼저 대답했지만 에그시는 방안을 뒤집어 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예요!!"
"전하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 시간에 그렇게 많이 움직이는 것은 숙면에 좋지 않..."
"어떻게 아냐고요!!!!"


 찰리가 그랬다. 왕실에 들어오고 나면 끊임없이 감시를 받을 것이라고. 전화도 도청될 것이고 내 일거수일투족이 하트가에 보고가 될 것이라고. 그들은 호시탐탐 자신을 구워 삼기만을 기다릴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해리의 말이 그 모든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전하..."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CCTV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요? 그럼 몰래 문을 열어서 봤어요? 정말 내 모든 게 하트가로 보고 되는 건가요?"
"네? 그게 무슨..."
"주변 사람들이 다 그래요! 나를 감시하기 위해 해리가 붙었다고!"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그가 저에게 비밀로 했으니 저도 모른 척을 하리라 했던 것인데 이상하게 감정이 제어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보고한 것은 오직..."
"뭔데요. 뭘 보고 했는데요!"
".... 전하께서 학교를 가시고, 무엇을 드시고 하는 일상적인..."
"그런 것들이 왜 하트가로 들어가요? 왜!!"


 제가 화를 내면서도 에그시는 자신의 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오는 대로 소리 지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보며 해리가 아주 느리게 일어나 에그시의 한쪽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하게도 더 화를 내고 싶은 말들이 입안으로 삼켜졌다.


"향기로 알았습니다."
"...네?"
"전하의 향기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해리는 에그시의 손목을 다시 조심히 놨다. 세게 잡히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잡혔던 손목이 얼얼했다.


"학교엔 며칠 못 간다 전해놓겠습니다."
"...왜요? 뭔데요?"
".... 며칠 힘드실 겁니다."
"네?"


 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그시가 어지럼증을 느끼며 근처의 탁자를 잡아 버텨 섰고 해리는 에그시쪽으로 한걸음 다가서다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사람처럼 자리에 멈춰서는 주머니속의 휴대폰을 꺼내 주치의를 불렀다.


"해..해리?"


 에그시의 눈빛이 점점 풀려가고 있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편 해리는 에그시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부축해 침대에 겨우 뉘었다. 생각보다 빠른 발현이었다. 누군가가 자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침대에 홀로 누운 그는 머리가 깨질 듯 한 고통을 느끼며 온 머리를 감싸고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여기서부턴 제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헐레벌떡 뛰어온 주치의를 본 해리는 그를 들이고 바로 나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곤 모든 경호를 강화하고 반경 20m이내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의 향기가 점점 더 짙어진다.
아주.... 힘들 것이다.






6.



 날이 밝았다.
 얼마 전부터 독특 항 향을 뿜어내던 제 군주는 어젯밤 기어이 몸살이 났다. 처음엔 저도 그 방문 앞에서 그를 지키려 했지만 너무 강하게 뻗쳐오는 향에 혹여 자신이 이성을 잃을까 싶어 해리역시 방으로 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제 손에 미약하게 남은 에그시의 향 때문에 손을 몇 번이나 씻어내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해리는 손에 든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새벽까지 인근에 진동을 하던 왕의 향기는 이내 잠잠해졌다. 주변을 모두 물리고 오메가 형질을 띄거나 베타 성향이 있는 궁인들만 들여보냈지만... 향기가 퍼지기 시작한 직후의 몇몇의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왕이 발현을 했다는 것을. 제가 보고하지 않아도 가문에선 벌써부터 소식을 접했을지도 모른다.
 대비의 가문은 당장이라도 혼사를 준비할 것이고 저의 가문은... 그가 오메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대체적으로 우성알파가 많았던 집안인 탓에 형질을 조금만 풀어내면 그들을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었고 근대에 와서 그런 행동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있어 그런 행동을 자주 행하진 않았지만 제 맘대로 되지 않을 땐 언제든 그런 원시적인 행동을 하고도 남을 가문이었다.
 그들의 권력을 향한 탐욕 한중간에 에그시가 발가벗은 채로 서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에 잠기느라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못 느꼈는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해리는 놀라 뒤돌아봤다가 그 정체를 보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섰다.


"그저... 생각 좀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
".... 여러 가지요."
"...."


노년의 신사는 해리를 보채지 않았다.


"입을 다문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질 않은가."
"저는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자네의 임무는 전하의 곁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우리가문에 전하는 것이지.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숨긴다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
"그저,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봤을 뿐입니다."
"무슨 상황을 말인가."
".... 생각보다 조금 이른 발현이라서 말이죠."


말을 듣던 신사는 해리에게 한 장의 사진을 넘겼다.


"누굽니까?"
"대비의 거처에 이 학생이 자주 드나드는 것 같은데 아는가?"


 얼마 전 하굣길에 에그시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던 학생이었다. 이름이... 찰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전에 한번 본 적 있습니다. 전하께서 아끼는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학교에 심어둔 우리 측 정보에 의하면 전하의 앞에서 노골적으로 형질을 드러냈다 하는군."
"...네? 그랬다면 주변이 모두 알았을 텐데..."
"그래. 마치 전하를 두고 제 것이라는 양 향기를 풀었다는 거야."
"...."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럼..."
"대비전에 아침문안을 갔을 때 대비역시 그런 짓을 했고."


 해리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 갖은 수를 써 에그시를 자극했던 그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잠시 주먹을 떨었다.


"자네는 대체 전하의 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
"누구라도 자신의 형질을 발현시킨 자에게 가장 먼저 끌리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자가 이렇게 눈앞에서 해스캣 가문에 권력을 빼앗길 셈인가."


해리는 다시 손을 들어 손에 쥐어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



"어, 찰리~ 오늘은 왜 혼자야?"
"뭐가?"
"너 전하랑 맨날 붙어 다녔잖아."
"아, 에그시~"
"야, 이름 그렇게 막 함부로 불러도 돼?"
"안 될건 뭐냐? 본인이 직접 그렇게 부르랬는데."
"찰리 해스캣."


 친구들과 노닥거리는 등 뒤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뒤를 돌아보니 어쩐지 자신의 형질을 풀어내고 있는 하트가의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닌가.


"아, 안녕하세요. 해리... 하트씨 맞죠?"
"나 좀 보지."
"왜요? 저 지금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나중에 하시죠."


 찰리의 능청스러운 표정을 보며 해리는 눈살을 한 번 더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표정을 풀며 안경을 매만지곤 조금은 정중하게 다시 말을 건넸다.


"국가적 사안이네. 자네의 수업보다 중요할 것 같은데."


 해리의 위압적인 알파향이 인근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을 느낀 다른 학생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고 찰리역시 제 형질을 죽이지 않고 적대적인 감정을 풀어냈다 .


"말씀하세요."
"잠시 나오지."
"왜요? 학교에선 좀 그런가요?"
"...."
"그렇게 있는 대로 형질 다 풀어놓고선.... 소문 안날 것 같죠?"
"도무지 예의가 없군. 자네 내가 누군지나 알고..."
"네, 알죠. 알다마다요. 에그시를 직접 그 시골 촌구석에서.."
"그 이름!"
"...."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는걸 모르나."
"에그시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는데요?"


 찰리의 이죽거리는 얼굴에 해리는 주먹이 올라갈 뻔 한 것을 한 번 더 참아냈다. 제 아들 뻘인 학생을 힘으로 제압하고 때렸다간 자신의 가문에 먹칠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요. 나가요. 덕분에 수업땡땡이 치죠 뭐."


 먼저 앞서나가는 찰리를 제가 뒤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어 해리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교내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백번도 더 참아냈다 .



-



 겨우 정신이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이미 한낮을 넘기고 해가 저물어져가고 있었다.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아 어렵게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의 궁인들이 제 주변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


 겨우 내뱉은 말은 쩍쩍 갈라지는 것이 이것이 과연 제 목소리인지 분간도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궁인 하나가 '아, 일어나셨습니까.'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바로 들고 있는 무전기로 '전하께서 일어나셨습니다.'하는 말을 전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 물 좀..."


 에그시의 말에 탁자 곁에 있던 궁인하나가 미지근한 물을 떠 그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고 에그시는 목이 타는 갈증에서도 받아든 물을 다 먹지 못하고 목만 축이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물정도로 해소되지 않는 이상한 갈증이 제 몸에 가득했다.


"좀 더 누워계셔야 합니다."
"저..."


 말을 이으려던 에그시는 눈앞에 보이는 궁인이 낯설어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리며 그 얼굴을 훑었다.


"어젯밤부터 전하의 처소로 배치되었습니다."


 에그시의 눈빛을 읽는 그녀가 먼저 대답해주었다.


"아, 그래요..."
"일어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리에 편히 계십시오."


 일어나고 싶었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눈앞에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목이 말라요..."


 에그시의 말에 궁인이 다시 물을 떠다 주었지만 에그시는 손사래를 치며 마시지 않았다. 목이 마른데 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주치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에그시는 여태 맡아본 적이 없던 독한 라일락 향기 비슷한 것을 느꼈다. 갑자기 치미는 향기에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자 그 행동을 본 주치의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가 제 겉옷을 하나 벗고 다시 들어섰다. 그 행동만으로 향기가 줄어든 것인지 에그시는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았다 .


"전하. 경하 드리옵니다."
"네? 뭘요?"


 자신은 아파 죽겠는데 뭘 축하한다는 말인가.


"오늘새벽 전하께서 드디어 발현이 되셨습니다."
"네...네?"
"그것도 아주 멋진 우성으로 발현이 되셨으니 경하 드리지 않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그럼... 전... 무...뭔가요?"
"오메가 이십니다. 그것도 제가 이제껏 본적 없는 우성형질로 발현하시었으니 왕실에 큰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


 말문이 막혔다. 한때나마 열성이더라도 알파이길 원했는데 강력한 오메가라니... 제 성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그 말에 에그시는 다시 어지럼증을 느끼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벌써부터 움직이시는 것은 건강에 좋지 못하니 잠시 누워계십시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 그럼 전... 어찌 됩니까?"
"네??"
"오메가라면... 저는...."


 그때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리곤 엄청난 장미향이 밀려와 에그시는 옆으로 돌아누워 치미는 헛구역질을 내뱉고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향을 개방한 채로 우성임을 강조하는 대비가 바로 서있었다.


"전하! 이 어찌 경사스럽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저게 무슨 말이야.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에그시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애써 풀려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장미향이 너무 지독했다.


"우성이시라고요! 우성 오메가이시라고요!"
"하아... 마마... 조금 언성을 낮춰서..."
"이런 경사를 어찌 낮춰 말하라 하십니까."
"제가 ... 후우...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오..저런. 많이 힘드십니까?"


 어느새 에그시의 곁에 와 침대에 반쯤 걸터앉은 그녀는 에그시의 이마를 직접 제 손으로 쓸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는 에그시의 찌푸려진 얼굴을 감상하며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 향기가 대비마마의 것입니까."
"오, 무슨 향을 말씀입니까."
"형질이 발현되면 향기가 난다 들었습니다. 헌데... 장미향이.."
"네. 저는 장미향이 난다고 하더군요. 애석하게도 저는 제 향기를 맡지 못하옵니다. 전하."


 그녀의 의기양양한 미소가 꼴보기 싫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양 어깨를 더욱 바로 세우며 저렇게 밝은 미소를 띈단 말인가.


"근데 그건 어떻게.... 조절이 안 되나요?"
"...네??"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머리가 아파서... 좀 지독합니다."


 제 장미향을 맡고 저런 반응을 보인사람은 처음이었다. 알파들은 껌벅 죽고 오메가들의 부러움을 샀던 자신의 장미향을 두고 지독하다니...


"안... 좋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불편하여 .... 우웁."


 결국 에그시는 대비의 눈앞에서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게워낼게 없는 헛구역질을 한 번 더 뱉어냈다. 자신의 향기를 두고 저런 반응을 보인자는 30평생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향기에 반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으면 하다못해 위압이라도 당하는 것이 상식인데... 어째서...


"죄송한데 두 분 다 물러주시겠습니까."


 에그시는 대비와 주치의를 손으로 대충 지칭하며 내밀어진 손을 나가라며 손짓했다.


"부...불편하십니까."
"네, 두 분... 잘 모르겠지만 우성이신 것 같네요. 두 분께서 계시니 머리가 더 깨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두통약 있으면 좀 놔주시겠습니까."
"네 전하. 여기... 그런데 지금의 두통은 약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에그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봤고 자리에선 대비는 그런 에그시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첫 발현엔 그냥 버티셔야 합니다."
"네??... 저 힘든데.."
"그것 말고 또 방법이 있지요."


대비의 목소리에 에그시가 시선을 조금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의 상성에 맞는 알파를 품으시면 됩니다."


 그 말에 에그시는 머리가 더 깨져오는 것 같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풀썩 쓰러져 숨을 몰아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주치의는 서둘러 그 맥박을 잡고 이런 저런 처방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대비는 손에 든 부채를 살랑이며 그 꼴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여기서 잘 못했다간 권력을 아예 뺏겨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리고 오늘 밤 찰리를 불러 우연을 가장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자리를 나섰다.



-



"아, 그 참. 하트씨. 에그시는 잘 있나요?"


역시 이름을 불러오는 그에게 해리는 최대한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하고자 했지만 꿈틀거리는 눈빛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불러선 안 된다는걸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 건가."
"아니, 에그시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
"얘기를 듣자하니 발현되었다면서요."


 왕실에 하트가의 사람이 많은 만큼 해스캣가문의 사람도 많았다. 그런 정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빨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으음..."


 찰리가 대번에 어느 쪽으로 발현 되었나 물을 줄 알았던 해리는 가만히 들고 있는 음료수를 홀짝이며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자신조차도 몇 일전부터 맡아오던 향기다. 한밤중 모두가 잠이 들어 잠잠해질 때 홀로 잠이 들지 않아 더 활개를 치던 향기를 교내에서 가장 친하다는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럼, 병문안이나 갈까."
"....."


 지금 막 형질이 발현된 오메가가 알파를 만난다는 것은 위험했다. 그래서 자신도 그의 곁에서 떨어진 것이고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전부 오메가나 베타들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런데 제 멋대로 소유욕의 향을 뿜어댔다는 녀석이 그에게 쉽게 접근하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하를 뵐 수 없다는 걸 모르나."
"왜요오?"
"....."
"아~ 오메가예요?"
"...."
"그럼 더 가봐야죠. 누구 덕에 오메가가 된 건데. 그거 아시죠? 자기를 발현시킨 사람에게 더 쉽게 빠진다는... 커헉."


 해리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켁...이..이거 놔...놔!!"
"나는 왕실의 최측근 보좌관이자 하트가문의 사람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이...이거 ...놔!....으윽.."
"감히 네놈이 전하를 업신여기다 내손에 다쳐도 난 끝까지 보호를 받는다는 말이지."
"윽...크흑.."
"대비의 가문이라고 내가 너를 손대지 못할 거란 오해는 안 하는게 좋을 거다."
"으윽..."
"어차피 우리 가문에 비하면 너희들은 모두 꼭두각시야."
"무...뭐라고?.."


 해리는 잡았던 손을 놓으며 찰리를 패대기치듯 바닥에 밀어버렸다.
풀썩 하고 쓰러진 찰리가 기침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그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몇 마디를 더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깟 해스캣 가문이 무서워서 살려두는 게 아니니."
"쿨럭... 아 진짜 이 아저씨 웃기는 아저씨네."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누가 하트가문이 우리 가문을 무서워한댔어요?"
"..."
"이봐요. 그럴 일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고요. 아우 목이야."
"......."
"당신들이 무서워 하는건 우리가문이 아니라 명분이잖아요."
"뭐?"
"왕실이 해스캣 가문에 손을 들어주고, 우리 쪽에 고위 인사자리를 주고, 가문의 자치병력을 해체하려고 한다면 하트가에 남는 게 뭐겠어요."
"그런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쿠테타죠. 결국 왕실을 뒤엎고 스스로 왕으로 일어서려는 거 모를 것 같아요?"
".... 지금 엄청난 반역을 입에 올렸다. 그것만으로 난 지금 네놈을 이 자리에서 체포할 수 있어."
"그러세요. 난 그러면 하트가의 속셈이라고 말할 테니."
"...."
"하.... 무섭긴 한가보네.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우린 균형을 맞추려는 것 뿐 이니까."
"...."
"최소한 왕이 우리사람이 되면 균형정도는 맞겠지. 제1의 가문은 다시 윈저가 되고. 자, 그럼 이제 누가 충신이죠?"


 해리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살아생전 제1의 가문의 타이틀을 내려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게 설사 왕가의 성씨라고 해도 감히 하트가의 것을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분노에 차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해리를 보며 피식 소리를 내고 웃은 찰리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서있던 곳을 빠져나갔다.


"아, 문자가 왔네요."


 그의 말에 해리가 느린 동작으로 자세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


"고모님이 뵙자고 하셔서. 궁에 들어가긴 해야겠어요."
"...."
"근데 어쩌죠. 우리 고모님께서 윈저궁에서 뵙자는 데요."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한밤중이었다. 방안에 작은 조명등만 켜져 있고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으로 봐선 많이 늦은 시각 같은데... 에그시는 주변을 더듬거리며 방의 불을 켜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켰다. 새벽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십 여개의 메세지들이 밀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학교에서 보낸 1주 동안 오지 않아도 된다는 안내 문자와 그사이 보이는 찰리의 안부 문자.


- 안 오냐? 많이 늦네?
- 선생님이 너 아프다던데 많이 아파? 괜찮은 거야?
- 어떻게 연락한통이 없냐. 괜찮으면 문자 한번 줘.



 그의 문자가 반가우면서도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핸드폰을 가만히 그러쥐었을 뿐이었다. 그때 방문 바깥에서 뭔가 시원한 향기가 밀려왔다. 분명 처음 맡는 향기인데 익숙한 향기.


"밖에 누가 계십니까."


 짙어지는 향기에도 반응이 없자 먼저 말을 연 것은 에그시였다.


"아직 안주무십니까."


 해리... 왜 갑자기 그 목소리가 반가웠는지 에그시는 침대바깥으로 튀어나가 몇 걸음 떼었지만 문득 그 문을 열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알파라고 했고, 지금역시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지 않았다 .


"자다가... 지금 깼어요."
"...네. 피곤하실 텐데 일찍 주무시죠."
"해리는 무슨 일이예요?"
"걱정이 되서... 한번 와봤습니다."
"네..."


 자신이 걱정되어 왔다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까지 몸에 미열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아직 자신의 신체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 저로써는 뭔가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좀 나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네 전하..."
"해리는... 별일 없어요?"


그가 서있는 문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그의 향기로 추정되는 향이 조금씩 더 짙어지고 중독성마저 느껴졌다. 더 맡고 싶어... 시원해.. 상쾌해..


"네, 별일 없습니다."


 목화 꽃향. 방금 피어난 듯 순수함이 묻어나는 향기가 자신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문을 열지는 않겠지만 그건... 이성이 살아있을 때의 얘기다.


"오늘은 마저 쉬시지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의 향기가 멀어진다. 잠시나마 머리가 상쾌해진 기분이었는데 그 시원한 향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숨을 몰아쉬다 문을 연 곳에는 누가 있던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다시 문을 닫고는 그 문에 기대 가만히 자신의 넓은 방을 둘러보다가 손에 든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 연락 못해서 미안. 괜찮아 졌어. 다음 주에 학교에서 보자.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 누구와라도.








7.


 간밤에 찰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어느새 까무룩 잠이든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깨어 제일 먼저 보였던 것은 눈앞의 제 손에 어설프게 미끄러져 걸쳐진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다시 잡아 버튼을 눌러보니 배터리까지 다된 것이 당장은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충전도 연결할 겸 가볍게 기지개를 켜는데 어디선가 푸근한 향기가 은은하게 제 코 끝을 간질이는 것이 아닌가. 잠시 향기에 취해 늘어져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에그시는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향이 전해져 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맞췄다.


"누...누구..."


 아침이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고 제 방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은 그녀는 에그시의 목소리를 듣고는 손에 있던 책을 옆의 탁자에 내려놓고 제가 쓰고 있던 안경도 내려놓으며 에그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행동이 매우 느린 것이 그림 같아서 잠시 넋을 빼고 있는 순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네?... 아, 네... 근데.. 누구세요?"
"전하. 신에게 그리 존대를 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지 않던가요."
"아, 네... 네... 그..그러면.."
"그대는 누구인가. 라고 하시면 됩니다."
"으..."


 그 표현이 어찌나 오글거렸는지 에그시는 아침부터 뒤집어진 머리를 하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마 저런 표현들에 익숙해지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릴 것이다.


"전하께 이런 기본의 소양도 가르치지 못하다니 제 동생 녀석을 단단히 혼내야겠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모습이 어딘가 겹친다 생각했는데...


"동생이라면..."
"네, 그레이스 하트입니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동생 해리의 누이 됩니다."


 앞가림이라니? 해리가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데... 앞가림이라면... 오히려 내가 못하는 거겠지. 에그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 손에 잡히는 다 뒤집어진 머리에 번쩍 놀래서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맨발로 허둥지둥 댔다.


"전하, 뭐 하십니까?"
"아니요. 잠시 계세요. 거울. 거울 거울 어딨냐. 거울."
"전하?..."
"아니요. 잠시 잠시만요. 아 나 옷. 옷."


 자신이 앓아 누워있던 사이에 다른 궁인들이 자신의 짐을 정리한 것인지 옷을 벗어두었던 곳에 옷은커녕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고 아무렇게 나 놓았던 손거울 역시 도무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옷을 먼저 드릴까요? 아니면 거울을 드릴까요?"
"아뇨. 잠시만 계세요."


 에그시는 허둥지둥 대며 안쪽의 욕실로 쏙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그 '찰칵'거리는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울을 본건지 '으으으으으' 하는 앓는 소리가 들려와 그 앞에 멍청하게 섰던 중년의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부탁이라고는 1도 모르는 동생 녀석이 부탁했을 땐 무슨 큰일이라도 난줄 알았는데...


"아, 뜨거."
"전하. 괜찮으십니까? 물을 맞춰드릴까요?"
"아니요!!!! 들어오지 마세요. 아이고."

'첨벙'


 뒤이어 들려오는 물에 빠진 소리에 부인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올해 들어 이렇게 크게 웃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욕실 안에선 한참이나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고 물소리가 끝나고 곧 나오겠지 기대했던 왕은 여전히 욕실 안에서 나오질 않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개미만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저... 그레이스 부인."
"네. 전하. 말씀하시지요."
"거기 혹시 입을만한 옷이 보이십니까?"
"네?"
"아... 여기 안엔 샤워가운 밖에 없네요."
"샤워가운을 입고 나오셔도 됩니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 그게...."
".... 왜 그러십니까?"
"여기....그... 속옷은 대체 어딨는걸까요?"


 에그시의 어렵게 꺼낸 한마디에 부인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었다. 그리곤 소리 없이 목을 가다듬고는 문에 가까이서서 조심히 말을 건넸다.


"거울 옆의 찬장을 열어보시면 그 안에 수건 함이 있을 겁니다."
"네. 그건 봤는데."
"그 아래에 금장으로 된 함이 보이시나요."
"....네. 있네요."
"거기서 꺼내어 입으시면 됩니다."
"...네..."


 에그시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귀여워 부인은 몇 번이고 웃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오늘은 의전을 하시지 않아도 되니 간단한 옷을 욕실 앞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 비켜 있을 테니 천천히 준비하여 나오십시오."



부 인의 말을 듣고도 잠시 망설이던 에그시는 문을 열자 보이는 작은 병풍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풍의 위로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확실히 부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제 옷은 그 위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



"그런데 다들 어디 갔습니까?"
"그걸 이제야 물어보시는군요."
"...아..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전하.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 주변엔 적어도 4인 이상의 궁녀가 있어야 하고 2인 이상의 호위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세안을 하실 땐 3명의 보조가 붙어 도와야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3인 이상이 붙어있어야 하죠. 학교를 가실 땐 2명이상이 붙어야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전하."
"...네."
"다른 궁인들에게 존대는 하지 마십시오."
"아.. 그런데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 자당께서 가정교육을 아주 잘 시키신 듯합니다."
"네.. 뭐..."
"허나 왕실의 법도는 새로 배우셔야 합니다."
"처..천천히 고치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에그시를 바라보며 어쩌면 왕실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콧대가 높은 귀족들이라면 충분히 구워삶을 것이다. 그런 아이를 두고 제 동생이 어떻게 '아주 가끔이지만 위엄이 있기도 하다'는 말을 했는지 아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아무도 없는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네."
"제 향기가 느껴지십니까."
"...어?"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잠에서 깰 때만 해도 뭔가 포근한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욕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샤워크림 냄새뿐 제 주변엔 어떤 냄새도 나질 않았다.


"어떻습니까?"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신건가요?"
"지금 이 방엔 어떤 향이 나는지 아십니까?"
"음... 욕실에서 샤워크림냄새가 나는데요."


 그 말에 부인은 숨소리 같은 웃음을 뱉었다.


"송구하게도 전하. 저에겐 샤워크림 냄새는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네?"
"오로지 전하의 향기만 가득할 뿐입니다."
"네에에??!!!!"


 부인의 말에 에그시는 목까지 벌개 지며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며 앉은 채로도 뭔가 주춤주춤 거렸다. 뭔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단 하나도 알 수 없으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당황스러우십니까?"
"네?"
"향이 더 진해지고 있습니다."
"으으으으."


여전히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는 부인의 얼굴을 보고 에그시는 입술을 깨물고 눈까지 감아가며 숨이라도 참아야하나 별생각이 다들 때 쯤 다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족과 왕족에만 전해지는 이 형질은 참으로 짐승 같은 습성이 있습니다."
"네?"
"평민들에겐 없는 것이라며 그렇게 우월한척 해대지만 아주 짐승 같은 습성이지요."
"무..무엇인가요?"
"간단하게 말해 이 향은 페로몬 입니다."
".....허얼..."
"상대를 유혹하고자 하는 거죠. 때문에 감정의 흐름에 따라 향의 색깔이나 무게도 달라집니다."
"헐..."


 그 '헐'이라는 표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인은 잠시 한쪽 눈썹을 올려 세웠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는 긴 숨을 내쉬며 자신의 향기를 살짝 풀어내 보였다.


"아... 이게... 무슨 향이죠? 처음 맡아보는데..."
"아무도 이름을 붙이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발현한 제 딸아이가 그러더군요."
"..?"
"햇빛에 말린 이불냄새 같다고 말입니다."
"와.... 맞아요. 진짜. 아, 그래서 포근했구나."
"포근... 하셨습니까?"
"네, 아침에 깰 때 그 향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어요. 뭐 금방 놀라긴 했지만."
"... 다행이네요."
"그렇데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절 하십니까?"
"그게 바로 제가 오늘 전하와 독대를 하는 이유 입니다."




-



>> 너 안보이니까 심심하다.
<< 야 난 오죽하겠냐. 궁에 갇혀 있는 거야 이건 완전히.
>> 내가 놀러갈까?
<< 너 들어올 수 있어?
>> 나아는 사람이 윈저궁에 있어서 그분 허락받으면 갈 수 있어.

 잠시 끊겼던 문자는 몇 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울렸다.

<< 지금은 와도 못 볼 것 같고 다음 주쯤 와라.
>> 다음 주에도 학교 못나와?
<< 그건 아직 모르겠어.
>> 왜? 어디가 아픈 건데?
<< 그냥. 몸살이야.


 간밤에 에그시와 주고받은 문자를 오르내리며 감상하던 찰리는 '그냥 몸살이야'라는 대목에서 '피식'소리가 나게 웃었다. 왕실의 최측근이라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 당사자는 모르는 척을 해대고 있으니. 찰리는 문자함을 몇 번 더 오르내리다가 화면을 끄고 자신의 스케줄 표를 뒤적거렸다. 어제 밤엔 하트가의 경비가 삼엄하다는 보고로 아예 들어갈 수도 없었으니.. 한 2,3일 뒤면 괜찮을려나. 기습인척, 이벤트인척 하지 뭐. 에그시가 뭘 좋아하더라...


"야, 뭐하냐?"
"아, 깜짝이야. 너 때매 폰 떨굴 뻔했잖아."
"어차피 몇 달에 한 번씩 바꾸면서 내 탓은."
"이거 아직 몇 달씩은 안됐거든."
"잘났다. 오늘 저녁에 뭐하냐?"
"별일 없는데 왜?"
"루푸스네 집에서 파티한데. 갈래?"
"아, 또? 안가, 안가. 피곤해."
"너 안 오면 후회한다에 천파운드 건다."
"...약하냐?"
"야, 그런 건 나도 이제 시시해서 안가."
"그럼?"


 바로 옆에 서있던 친구는 찰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귀에 다 작은 목소리로 소근 거렸다.


"오메가들을 부른데."
"...어떻게?"
"몇 년전 있었던 사화에 몰락한 귀족집안 많잖아. 거기서 오메가 몇을 부르나봐."
"허. 나 참. 그래도 귀족신분인데 명예고 뭐고 없고만."
"굶어죽는데 명예가 어딨냐? 요즘 세상에 돈 없이 안되는 게 어딨겠소~."
"그 자식 네 집은 안 망하냐?"
"금광채굴권을 가진 집이 망하겠냐? 아무튼 갈 거야?"
"봐서. 몇 신데?"
"9시. 꼭 와라. 같이 재미 좀 보자."


'딩동딩동'


"너 다음 수업 뭐냐?"
"쨀려고."
"뭐?"


 찰리는 친구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쉿'하는 입모양을 하고 웃어보였다.


"대비마마한테서 전화가 와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친구에게 들어보이자 친구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반대쪽 복도로 뛰어갔다.


"네, 여보세요."
[찰리. 수업시간이니?]
"수업시간이면 받겠어요?"
[...넌 받고도 남을 애잖니.]
"하하, 방금 종쳤어요. 무슨 일이세요?"



-



 꽤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선 에그시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이스가 방긋 웃으며 그에게서 멀어지자 에그시가 그녀를 다급하게 불렀다.


"아, 잠깐만요. 해리는 우성이라고 했는데요."
"네. 맞습니다.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저조차도 어쩌질 못할 겁니다."
"아... 잠깐만요. 저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학교를 가셔야겠죠?"
"네?"
"학교에서 친구들과 그 전처럼 놀고 싶으시죠."
"네..."
"그럼 이런 훈련이 한번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네..."


 부인은 에그시를 자리에 세워두고는 방문으로 직접 걸어가 조심히 문을 열어 손짓으로 문 넘어 에 있던 해리를 불렀다. 그에게선 어떤 향기도 나오질 않았지만 그냥 전에 들었던 '알파'라는 말 한마디에 괜히 쫄아서는 어쩌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웃어보였을 뿐이다.


"전하."
"네?"
"힘드시면 나가 있겠습니다."


 해리의 말에 에그시는 어쩌지도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제 향이 제대로 조절이 되고 있는 것인지 어쩐 것인지 제대로 파악도 안 되는데 집중도 안 되고... 그때 그레이스가 바로 에그시의 옆으로 다가와 그 손목을 살짝 쥐었다.


"잘하고 있으니 저를 믿으십시오."
"제가.. 잘 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
"완벽하진 않습니다."
"에휴..."


 에그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고 그의 행동이 재밌었는지 그레이스는 에그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귓속말을 건넸다.


"해리를 보십시오."
"네?"
"전하께서 완벽하지 않으시다는 증거 입니다."


 부인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해리를 보니 꽉 다물어진 입 때문에 턱 근육이 도드라진 채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짧은 숨을 몰아쉬는 것이 보였다.


"해리?"
"네?"


 그리고 제 부름에 저렇게 놀란 듯이 대답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막상 해리를 불러놓고 할 말이 없었던 에그시는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었는데 가만히 눈을 맞춰오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을 피하더니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하."
"네. 부인."
"해리가 왜 평소와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네."
"좋은 보좌관을 잃을 수도 있으니 연습을 게을리 하시면 안 됩니다. 다시 집중해보세요."


 그 둘의 연습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그 앞에 실험 대상처럼 버려진 해리는 불쾌함과 민망함과... 그 속에서 뭔가 달짝지근 한 것이 끓어올라. 해리는 한마디로 속이 타 죽을 지경이었다.



-



 제차를 스스로 몰고 루푸스 저택에 도착한 찰리는 그 문 앞에 차를 세우곤 안에서 밀려오는 진한 알파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놈들... 발정이라도 난건가. 차키를 그 집의 집사에게 맡기고 그의 표정을 보니 별다른 내색 없이 미소 지으며 키를 받는 것이 이 모든 향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인듯 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베타가 나을 수도.

 문을 열고 들어서 바로 보이는 풍경은 여느 파티들과 다르지 않았다. 제 또래로 보이는 루푸스의 친구들과 몇몇 아는 얼굴의 녀석들도 남녀 할 것 없이 즐겁게 웃으며 약간은 취해있었고 녀석들이 말하는 그 '오메가'들은 어딨는지 보이질 않았다.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야! 찰리!"


 사람들 틈에서 저를 발견한 건지 루푸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대충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여전히 그 말로만 듣던 존재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이렇게 늦었냐?"
"안 오려다 온 거니까 잔소리는 말고."
"뭘 그렇게 찾아?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했어?"
"어딨냐?"
"뭐가?"
"너 오늘 '스페셜'한 거 준비했다며."
"하- 이 새끼 노골적인 거 보게. 오자마자 그것부터 찾냐?"
"닥치고 있냐 없냐. 그것만 말해."
"없겠냐? 저기 쟤네들 보여?"


 루푸스가 가리킨 쪽에는 소파에 한데 앉아모여 저마다 시끄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무리들이 보였다.


"쟤네가 왜?"
"아까부터 '경험담'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찰리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옆에 선 제 친구를 살짝 노려봤다.


"고결한척 하지 마. 지도 궁금해 했으면서."
"그래서. 어딨는데?"
"너 지금은 못할 텐데?"
".... 어딨냐고."
"2층에. 올라가서 왼쪽 복도로 들어가면 돼. 향기 나니까 방 찾는건 어렵지 않을 거야."
"... 한명이야?"
"아니. 여러 명이었는데... 다른 애들은 다 뻗었고 하나만 남았어."
"...."
"그 방에서만 향기가 안날거야. 올라가봐."
".... 왜 남았는데?"
"아 몰라. 니가 물어봐."


 루푸스는 찰리의 어깨를 한 대 치고는 바로 다른 친구들에게 향했고 찰리는 2층을 가만히 보다가 계단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2층의 왼쪽복도엔 달짝지근한 향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몇 개의 방에선 훌쩍거리는 듯 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류의 취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그들이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 저절로 '쯧'하는 혀를 차는 소리를 내버렸다. 그리고 루푸스의 말대로.... 가장 안쪽에 남겨진 방 하나에서만 아무런 향기가 나질 않았다. 오메가가 아닌가?

 '똑똑' 소리를 내어 노크를 해도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있지도 않았고... 찰리는 그대로 문을 열어 안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나름 잘 꾸며진 안에는 딱히 브랜드는 아니지만 평범한 옷을 정갈하게 입고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오메가라... 귀한데 이런 건.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야. 들어가도 돼?"


 제 또래로 보였기에 한 번에 반말을 했는데 상대는 찰리를 가만히 노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벙어리는 아니지?"


 그 말을 하며 들어와 문을 잠글 때도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찰리를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오해 하지마. 그냥...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
"... 너 정말 오메가는 맞아?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향기가 안 나지? 반반하게 생기긴 했다만. 베타아니야?"
"나가."
"오, 다행이네. 말할 수 있구나. 네 향 조금만 풀어볼래?"
"나가라고 했어."
".... 저기 미안한데. 루푸스가 너 네를 샀다고 들었어. 그럼 일단... 나한테 그렇게 명령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난 그런 건 몰라."
"몰라? 몰랐어?"
"...."
"그건 좀 안됐네... 쟤네들도 다 몰랐던 거야?"
"...."
"야, 나 미친놈 같잖아. 말 좀 해."
"할 말 없으니까 나가."


 그 말에 찰리는 가만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옆방과 마주하고 있는 벽을 톡톡 두드려보았다. 얇은 합판. 분명 옆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었을 것이다. 아무런 향기는 나지 않았지만 옆에서 전해지는 향기와 소리를 듣고 이 방에 드는 모든 자에게 경계를 표했음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찰리는 대놓고 자신의 알파형질을 풀어냈다. 조금 약하게 풀긴 했지만 보통의 오메가들은 모두 놀라는 눈빛이라도 보일 텐데 눈앞에 이 사람은 자신을 조금 노려볼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그 모습이 낯설고 재밌었던 것일까. 찰리는 방안의 남은 의자를 잡아끌어 그 사람과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름이 뭐야?"
"알면."
"그냥. 궁금해서."


 찰리의 향기는 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조금 진하다 싶을 정도로 풀어내니 눈앞의 녀석이 잔기침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내리쳤다.


"오메가는 맞아?"
"...쿨럭..."
"왜? 내 향기가 지독해?"
"나가!"


 드디어. 상대의 형질이 풀렸다. 겁이 나고, 또한 화가 나면서 감정이 격하게 변하자 자신의 형질을 기어이 풀어낸 것이다. 터져 나오듯 제 주변을 감싸는 그 오메가의 향기가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매우 유혹적이었다.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먹었다면 답도 없이 관계했으리라.
 찰리는 기어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형질을 풀어냈고 눈앞의 상대는 점점 몸이 무너지더니 갑자기 찰리를 노려보며 자신의 오메가 향을 완전히 개방해 버렸다. 지극한 우성. 이 상황에 놀란 것은 오히려 찰리였다.


"너..."
"나가."


 유혹적이었던 그의 향기가 방을 가득 메우면서 찰리의 피부를 아프게 찔러대기 시작했다. 마치... 장미의 아름다움에 반해 덥석 쥐었다 손에 잔뜩 잡히는 가시처럼... 자신을 이렇게까지 이겨먹는 오메가는 처음 본 찰리는 땀까지 흘리며 안간힘을 썼다. 강한 우성이다. 오메가 이지만 웬만큼 강한 알파가 아니라면 절대로 찍어 누를 수 없는. 보통의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이렇게 따갑게 느낀다면 보통의 다른 녀석들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봐. 나도 우성이야."
"..."


 상대는 말도 없이 향을 더 피워댔고 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독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개방했다. 그때 눈앞의 상대가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져버렸고 바닥의 러그를 손으로 잡아 뜯으며 몸을 꿈틀거렸다.


"하... 그냥 말로 도왔으면 좋잖아."
"...윽....흐... 그..그만둬."
"야. 후우... 너 조금 전에 나를 이기려고 했던 거지?"
"아...아니야..윽.."
"아니긴 뭐가 아니야."


 찰리는 자신의 형질을 죽이지 않은 채 상대에게 다가섰고 러그를 쥔 그의 손앞에 다가서자 그는 러그를 쥐던 손을 놓고 찰리의 발목을 잡았다.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다.


"난 아래층에 있는 발정난 개새끼가 아니라서 말이야."
"...하....하아..."
"숨 몰아쉬지 마. 향 더 진해지잖아."


 그대로 무릎을 굽혀 자리에 앉은 찰리는 아직도 제향에 못 이겨 부들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살짝 쓸어 올렸다. 마주해오는 눈빛이 두려움과 유혹을 모두 담고 있어 매우 묘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확실히 널 따먹으면 자랑거리는 되겠다."
"...하...하지 마.."
"응. 안할게. 근데 실제로 안하는 거랑 다르게 소문나는 건 어쩔 수가 없겠는데?"
"....."
"니 아래 다 젖은 거 말야. 누가 와서 보면... 이미 다 어떻게 한줄 알겠다. 걱정 마. 손은 안댈 테니까.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
"...뭐?"
"너 정도의 우성오메가를 내가 이길 수 있나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
"보니까. 되겠네."


 찰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에 숨을 들이키며 제 형질을 죽였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은 바닥에 그대로 풀썩 누워버렸다. 작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이제 서야 조금 숨통이 트이는 듯 보였다.


"추잡한 소문이 싫으면 너도 그 형질 죽여."


 그 말에 상대의 오메가향도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없어져버렸다.


"그 유명한 해스캣가문의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몰락한 귀족과 떡을 쳤다는 소문은 나도 그리 달갑지는 않아서 말이야."
"해스캣..."
"응. 무슨 뜻인지 알지?"
"...."
"함부로 입을 놀리면 넌 죽는다는 뜻이야."



-


 조금 쌀쌀해진 탓에 따뜻한 차를 들어 테라스로 나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신의 살짝 뒤쪽엔 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 종일 연습을 해봤지만 잘되는지 어쩐지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았다. 테라스의 문을 닫고선 해리의 옆으로 가 자신도 그 문에 살짝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저... 하나만 여쭤 봐도 되나요?"
"말씀하시지요."
"저한텐 어떤 향기가 나요?"
"...."
"저마다 향기가 다르다잖아요. 자기 향기는 맡을 수 없다고 하기도 하고.


 해리는 제 옆에선 에그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 자신의 향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다. 은은히 퍼져 나오는 향을 슬며시 들이킨 해리는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목화향입니다."
"... 목화도 향이 있어요?"
"네."
"음.. 어떤 향인데요?"
"내달에 목화 꽃이 피는 정원을 안내해드리지요."
"와...."


 대답도 아닌 감탄사를 뱉는 에그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만히 해리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왕실에 목화 꽃도 피어요?"
"네, 해마다 여름이 지날 무렵 피는 곳이 있습니다."


해리의 말을 듣고도 에그시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해리."
"네."
"고마워요."
"... 무엇을 말입니까."
"뭐든요."
".... 전하."
"네."
"그나저나 제가 누님께 크게 한소리를 들었습니다."
"뭘요?"
"저에게 하대는 안하십니까."
"꼭 해야 되요?"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하트가문의 사람입니다."
"...."
"모두의 앞에서 저를 하대하시는 것이 전하의 위상을 높이는 가장 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해리."
"네. 전하."
"전 누군가를 하대하고 밟고 일어서면서 군왕이 될 생각은 없어요."
"...."
"난 내 주제를 아주 잘 알거든요."
"전하. 주제라니요."
"대비께서 나를 옹립해주었고 하트가의 보호를 받고 있죠. 두 가문으로부터 필요성이 상실되면 나의 왕 노릇이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
"그래도 왕관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동안은... 역대 가장 평범한 왕이 되고 싶어요."
"선정을 베푸시는 게 아니고요."
"선정을 베풀어야죠. 어디선가 책에서 읽었는데 '백성들이 왕의 이름을 모르면 그 시대가 태평성대다'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
"전 사람들이 저를 몰랐으면 좋겠어요."
"...."
"그러니, 제 선정의 첫 번째로. 아무에게도 함부로 하대하지 않을거예요."
"전하."
"특히 내 사람한테는."


 그때 밝게 웃어 보이는 에그시를 내려 보며 해리는 하마터면 그에게 맞춰 고개를 내릴 뻔했다.
 그 갑작스러운 충동을 이겨내며 그것이 이성적인 행동이었는지 단순한 호르몬에 의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는지 당장은 알 길이 없었다.


"나 아직도 부족한가보네요."
"네?"
"하하. 내가 제대로 형질 제어를 못할 땐 해리를 불러보면 되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놀란 눈으로 '네?'하는 소리를 내는 건 제가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
"지금 그렇게 심하게 나요?"
"아니요. 심하지는 않습니다."
"심하지 '는'은 나긴 한다는 거네. 잠깐만요 집중해볼게요."


 에그시는 눈까지 꼭 감아가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 주변을 감싸는 향기는 조금씩 잦아들다가 어느새 흔적을 감췄다.


"어때요?"
"... 잘하시네요."
"거짓말."
"...."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 있어요. 잠깐만요. 다시 해볼게요."


 다시 눈을 감고 집중하는 에그시를 보던 해리는 한손을 들어 제 볼에 얹어보았다.
뭐가 잘못된 건지 손끝에 전해지는 제 볼의 따뜻한 감각에 해리는 들리지 않을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


에그시의 물음에 해리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8.




 중간에 다섯 명은 더 앉아도 될 것 같은 기나긴 식탁의 양쪽 끝에 해리와 에그시가 앉았다. 해리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에그시의 곁에는 그레이스가 바로 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려우십니까."
"네..."
"그것도 전부 해리에게 전달 될 겁니다."


 에그시는 그 말에 전방에 보이는 해리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에그시의 불안한 향내를 감지한 해리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문득 이렇게 마주해 본적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거의 항상 옆이나 뒷모습을 봤던 것 같은데... 눈앞에 안경을 벗은 무표정한 해리의 얼굴을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제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살짝 눌렀다.


"전하."
"네."
"먼저 향을 완전히 감추십시오."


 그 말에 에그시는 허둥지둥하며 항내를 감췄다. 그의 향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레이스가 에그시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호감을 표현하는 것도 향으로 전달이 됩니다."
"네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에그시를 보며 그레이스는 마치 제 아들을 보듯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리곤 해리를 보며 사인을 보내는데 바로 다급한 에그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갑자기 속사포같이 말을 내뱉어내는 에그시에 둘이 멍청한 얼굴이 되어 에그시를 바라보았다.


"아, 저 정말 자신 없어요."
"...전하."
"아우우우 미치겠네. 진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에그시를 보며 해리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전하."
"...."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 하아..."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걸 해리가 어떻게 장담해요..."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에그시는 고개를 들며 해리를 쳐다봤다. 입을 다문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비쳐내질 않았고 오히려 일면 담담해보였다.


"에휴...."


 눈에 띄는 긴 한숨을 내쉰 에그시는 그레이스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자리에 바로 앉았다.


"전하. 아주 조금일 뿐입니다. 그 정도로는 생각하시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한지 꼭 읽어낸 사람처럼 둘이서 쿵짝이 아주... 속으로 조금 더 꿍얼거리는 동안 아주 얕은 향이 느껴졌다. 에그시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졌고 아주 느린 동작으로 해리를 돌아봤다. 그의 향이다. 발현하고... 그 다음날 밤 방문 넘어에서 느껴지던 그 시원한 향기. 조금 더 맡고 싶다. 시원해. 에그시의 머릿속엔 오로지 시원하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자신의 몸에 쌓여있던 갈증이 해소되는 듯 했다.


"전하."
"네."


 그레이스의 부름에도 에그시는 해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향을 거두세요."
"네."


 얼이 나간 사람처럼 대답을 하면서 에그시는 자신의 향을 억지로 가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고 다시 뿜어져 나왔다.


"전하."
"....네."


 해리의 향기가 조금 더 진해지자 에그시의 반응속도가 느려졌다.


"집중하셔야 합니다. 전하의 향기를 내비쳐선 안 됩니다."
"....네..."


 자리에 앉은 에그시는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 같았다. 그레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해리에게 사인을 보냈고 주변을 감싸는 청량한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깜박인 에그시는 금세 얼굴이 벌개져서는 서둘러 자신의 향내를 가두었다.


"전하."
".... 이거 봐요. 잘 안 될거라고..."
"아니에요. 처음치곤 잘하셨습니다."
"...으으..."


 도무지 해리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저의 몸은 자리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제 영혼은 이미 테이블의 한 중간까지 가있었다. 주변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저 멀리 있는 해리만 확대되어 보였다. 그 짙은 갈색눈동자에 취해서 기억이 몽롱해져 갈 때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곤 더 이상 해리의 향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그 마약과도 같은 알파페로몬의 체험에 에그시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테이블에 '쿵쿵'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박았다.


"어머, 전하."
"으으 멍청이, 멍청이."
"전하. 그만하세요. 옥체 상하십니다."
"옥체는 무슨 옥체입니까. 어휴 정말..."


 그레이스가 에그시의 어깨를 억지로 잡아 세웠을 때 에그시는 목과 귀까지 빨개져선 들리지도 않을 욕지거리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내 뱉고 있었다.


"전하. 그 정도면 생각보다 훨씬 잘하신 겁니다."


 해리의 말에 고개를 들어 곁눈질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던 아까와는 달리 그는 아주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아주... 약간이었잖아요. 그런데 고작 그거에... 어휴 나 정말.."
"전하."
"....에휴...네."
"약간이 아니었습니다."
"네?"


 그레이스의 말에 에그시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해리. 솔직하게 말해주겠니?"
"...."
"분명 나는 조금만 풀라고 했다."
"....네. 조금은 아니었습니다. 전하."
"그 이유도 설명해줘야 하지 않겠니?"
"...."
".... 해리?"
"...."
"솔직하게 말해."
"....전하의.... 향기를 맡고..."
"....???"
"...제어가... 잘 안됐습니다."


 말을 마친 해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표정을 보고 살짝 미소 지은 그레이스는 에그시의 옆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해리에게 나가 있으라 말했다. 평소 같으면 전하의 하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할 텐데 해리는 안 그래도 그러려 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이닝룸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방금 해리의 말을 이해하십니까. 전하."
"네? 아...아니요. 그냥... 제어를 못했다고..."
"네, 그랬습니다."
"근데.. 그게 저때문인가요?"
"제가 중간에 향기를 거두라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네..."
"그때 잠깐 제어됐다가 다시 풀려나올 때 전하의 향기 농도가 훨씬 더 진해졌습니다."
"...네..."


 생각해보면 그때 뭔가 훅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라면 향이 더 진해진다는 건가.


"그 향기에 해리도 역시 반사적으로 제 향을 풀어 낸겁니다."
"...."
"그렇게 서로 치고나가듯이 향기가 상승하게 되면 전하께서 안 좋게 생각하셨던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으으으..."


 에그시는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또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해리는 전하보다 더 어렸을 적에 발현되었고 컨트롤 하는 법도 그만큼 빨리 익혔습니다. 귀족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죠."
".... 그럼 저는 어떻게 하나요."
"연습을 하셔야지요."
"그럼...역시 학교는 못나가나요."


 집안 어른으로부터 학교에서 소유욕의 향기를 뿜어내는 학생이 붙어 다닌다는 소문을 그레이스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라면 에그시는 위험했다. 그런 '봐주지 않는'향기에 노출되고 나면 정신적으로도 쉽게 잡아먹힐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향기는 순수했다.


"지금이라면 그렇습니다."
"....하아..."
"그래도 좋은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이요?"
"전하께서 아주 강한 우성이라는 점입니다. 제대로 뿜어내기만 하면 다른 열성의 알파들은 전하 앞에서 꼼짝도 못할 겁니다."
"그래요?"
"물론 지금은 좀 어렵겠지만요."



-



 다이닝룸을 빠져나온 해리는 그대로 바로 로비를 가로질러 정원으로 나갔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급한 발걸음 때문인지 숨이 가빠와 한참을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에 에그시의 모습은 사라지질 않았다.

 마치 환상을 본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있던 에그시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올리브색 눈빛에 취해 더 이상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형질이 마음대로 조절 되지 않았다. 최소한 해리하트에겐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실로 두려운 경험이었다. 그를 제 손으로 왕으로 올리고 최소한 다른 이들의 추잡한 흙탕물로부터만 지켜주자는 혼자만의 약속을 스스로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조금 더 발전한다면... 자신을 이겨버릴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묘한 공포감 까지 심어주었다. 페로몬으로 굴복 당한다는 불쾌감이 아닌... 저가 누군가의 힘에 휘둘릴 수도 있다는 공포. 조금은 그를 경계해야 하는 걸까. ... 그러기엔 환영 속에 보인 그 희미한 미소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딩동'

>> 집안에서 20년 동안 결혼하라 할 때는 독신주의자 이냥 처내더니 순수한 어린향기에 한 번에 무너지는구나. 너 로리콤있니?


 그녀의 문자가 조롱인지 장난인지 한 번에 구분이 가지 않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딩동'

>> 아무리 힘이 없대도 윈저가문에서 40살 넘은 남자, 그것도 하트가문 사람을 왕실 가족으로 들일 생각은 없을 테니 꿈도 꾸지 마.

 

 그녀의 이어진 문자에 해리는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그 옛날의 폴더폰이었다면 '팍'소리가 나게 닫아버리고 싶을 만큼 얄미운 문자였다. 자신도 정리 하지 못한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  처럼 말하는 제 혈육의 장난질을 걷어찰 수만 있다면 정말 신명나게 걷어차 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딩동'

>> 세컨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호호.
 


 문자함을 열질 말았어야 했는데.... 해리는 기어이 핸드폰 뒷면의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오메가 인데 이런 식으로 저를 가지고 노는 통에 꼭 막판에 한 번씩은 화를 내게 만들고야 만다.

 핸드폰이 들리지 않은 손으로 제 이마를 한번 쓸어내고 눈을 가리자... 다시 에그시의 환영이 보이는 듯 했다.

 

"Shit..."

 

아무도 듣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외교부장관 드시었습니다."
"오. 드시라 이르라."


 문이 열리자 '장관'이라기엔 아직은 젊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차를 즐기던 대비는 벌떡 일어나 직접 그 앞까지 다가섰다.



"마마. 잘 지내셨습니까."
"다니엘! 어찌 연락도 없이 오셨습니까."



대비의 말에 살짝 웃어 보이는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포장되어 있는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풀어보시지요."


 선물상자를 든 대비는 가까운 테이블을 찾아 앉아 기쁜 얼굴로 꼼꼼하게 풀어보았다.
 그 안에서 작은 함이 나왔고 그것을 열자 안에는 태양의 빛을 머금은 듯한 황금색의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거 설마..."
"호박색의 물방울 다이아 입니다. 오래 전 부터 갖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구하신겁니까... 유럽 땅엔 씨가 말랐다 들었는데."
"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위해 발품 좀 팔았지요."


 대비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하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왕실은 어떻습니까? 전에 말한 웨일즈의 청년은 잘 구워지던가요?"


 그 말에 대비는 한숨을 쉬며 손에 쥔 보석의 뚜껑을 닫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요 며칠 문안도 받지 못했습니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왕실에 가장 큰 어른은 마마가 아니십니까."
"허울뿐이지요. 하트가가 작정하고 왕을 감싸고 있습니다."
"하트가라니요..."
"하트가문의 해리와 그 누이인 그레이스가 왕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질 않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 발현한 이후로는 수련을 하네 뭐네 하면서 왕의 거처 반경 20m안에는 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왕이 발현을 했다고 해도 그게 왕실의 어머니인 마마께서 관리해줄 일이지 어째서 하트가가 나선단 말입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저렇게 작정을 하고 나서는데 어디 틈이 있어야지요. 겨우 사람하나 붙여놨는데 그마저도 시원치 않은 모양입니다."
"사람이라니요. 누구를..."
"큰 오빠네 찰리 말입니다."
"아, 찰리... 그러고 보니 나이가 비슷하겠군요."
"동갑인데다 같은 학교에 다녀서 며칠 같이 다니면서 절친해졌더라고요."
"오, 그럼 찰리를 부르면 되겠군요."
"그것도 하트가에서 막고 있답니다."
"아니 왕께서 친구를 만나는 것도 막는단 말입니까? 이건 전횡이 아닙니까?"
"어쩌겠습니까. 힘이 없는 것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마마께서 직접 나서서 친히 보살피겠다 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좀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전에 제 향기를 맡고...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구역질을 하지 뭡니까."
"네?? 마마의 장미향을 맡고 말입니까?"
"네! 내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그런 광경은 처음 봅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같은 오메가라면 오히려 부러움을 살터인데..."
"그러니까요! 그때 사실 쫌... 마음 상했습니다. 대놓고 역겹다니. 허 나 참 진짜."
"... 설마 우성입니까?"
"네. 그렇데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극의 우성끼리 만나면 어지럼증이 심해진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기엔 그 왕의 체취가 가득한 곳에서 전 멀쩡했습니다."
"오, 어떤가요? 그 향은?"
"풋내죠. 아기분내 같더군요."
"하하. 정말 그런 향이 납니까?"
"네, 그렇대도요. 어떤 알파를 만날지 모르겠지만 만난다면 아마 첫 번부터 깨물어주고 싶다고 생각할겁니다."


 대비의 말을 듣던 남자는 그녀와 같이 따라 웃다가 순간 웃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마마. 찰리가... 우성 알파가 아닙니까."
"이르다 뿐입니까."
"그럼 혹시 찰리를..."
 

 그제야 대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가족들 중에서도 일찍 발현한 탓에 어려서부터 형질조절을 배운 아이 입니다.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죠."
"....그럼.."
"그저...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눈빛만 봐도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마마. 향내를 맡으려면 최소한의 거리가..."
"지금 왕을 오메가로 발현시킨 것이 우리 찰리입니다."


 대비의 말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첫판부터 본딩이나 되진 않을까 그게 걱정일 따름이지요. 본딩이 되어 감정이라도 주고받으면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마마."
"네."
"일에는 순서가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단 모든 귀족가문에 금혼령 부터 내리시지요."
"아..."
"왕실에 큰 '행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핸드폰이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벌써 몇 번째로 사서함으로 넘어가는지 모른다. 에그시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든 핸드폰을 침대로 살짝 던졌다. 오늘 오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해리의 뒷모습이 하루 종일 잊혀 지질 않았다. 아 정말 이런 걸로 어색 해지는 거 제일 싫은데. 싸운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정말. 에그시는 창가에 기댄 채 입술을 삐죽 거리다 침대위로 몸을 던져 제가 먼저 던져둔 핸드폰을 열어 손끝을 깔짝거렸다.


[여보세요?]
"찰리?"
[어? 에그시?]
"응."
[야! 나 완전 놀랬잖아.]
"왜?"
[전화는 처음이잖아 인마.]
"아, 그런가?"
[난 니가 전화가 너무 없어서 인어공주마냥 목소리를 잃은줄 알았다.]
"아 뭐래. 미친."
[그나저나 괜찮냐?]
"응. 뭐 그럭저럭 괜찮아."
[그럼 다음 주에 나오는 거야?]
"나는 나가고 싶은데... 몰라. 허락을 해줘야 나가지."
[왕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네.]
"응. 더 답답해. 차라리 시골살 때가 좋았지."
[왜? 거기가 더 좋냐?]
"내 맘대로 하니까. 날 더우면 계곡 가서 물장구도 치고."
[왕궁 안에도 작은 계곡 있잖아.]
"있으면 뭘하냐. 그림의 떡이지. 그놈의 옥체가 상한다고 근처도 못가게해."
[하긴. 너 감기 걸리면 여러 사람 피곤해지지.]
"말을 해도..."
[전하의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오니 야외의 물놀이는 허락해 드릴 수 없사옵니다.]
"와- 진짜 똑같았어."
[똑같아? 누구랑?]
"해리랑."
[......]
"아, 해리 하트라고 내 보좌관이야. 그 사람이 맨날 나 이것도 못 한다 저것도 못 한다 다 막거든."
[그래?]
"응. 나 무슨 7,8살 꼬마가 된 것 같다니까. 어렸을 때 엄마가 얼마나 안 된다 안 된다 소리만 하는지... 엄마는 안 된냐는 말밖에 모르냐고 빽빽 댔던게 새삼 생각나더라."
[그 사람 너무하네. 내일모레 스무 살인데 왜 그렇게 다 못하게 해?]
"그러니까. 날 왕처럼 대해준다면서 정말 꼬마애로 보는것 같다니까."
[진짜? 뭐야. 너 우습게 보는 거 아냐?]
"응?"
[하트가 사람이라며. 그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아냐. 어휴... 난 근처도 못 간다. 너 그 사람들 맘대로 부리려고 할 거야 조심해야 돼.]
"음.. 그런가. 하지만 왕실의 법도 같은 건 내가 잘 모르니까 그 사람들이 다 알려주는걸."
[왕실에 사람이 없냐? 깔린게 궁인들인데... 그 사람 정말 너 가둬 놓는거 아냐?]
"....나를?"


 찰리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잘못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형질이 발현되고 난 다음날 몇 보이던 궁인들은 모조리 물렸고 해리는 자신의 누이를 시켜 개인강습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에그시는 형질을 제어하는 수련을 핑계삼아 성안 곳곳에서 가끔 마주치는 궁인들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그 둘하고만 함께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 권력욕이 얼마나 대단한데. 지금도 제1의 귀족이면서 그 자리 지키려고 아등바등할걸. 감히 왕을 붙잡아놓고 말이야.]
"... 그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
[물론 그야 그렇지만. 너도 니가 니입으로 왕실의 법도를 모른다고 배워야 한다고 했잖아.]
"응."
[야 그럼 완전 입안에든 사탕이지. 저들 입맛대로 굴릴걸? 너 거기서 못나가게 하는 것도 결국 하트씨 짓 아니야?]

 

 찰리의 질문에 한 번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를 격리시킨 것은 하트의 짓이 맞지만 그것을 그리 나쁘다고만 볼 문제는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작은 알파향에 자신이 얼마나 흔들릴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으므로...
 

[에그시?]
"...."
[야, 자냐?]
"어? 아냐, 아냐. 갑자기 잘 안 들렸어."
[궁에서? 거긴 전화랑 와이파이는 진짜 잘 터지는데.]
"아, 창밖에 매미가 어찌나 우는지 시끄럽다 야."
[그래?]
"응."
[아, 그나저나. 나 언제 놀러가냐.]
"어딜?"
[어디긴 어디야. 너 사는 데지. 나 윈저궁 구경시켜 준다며.]
"구경은 무슨... 나도 여기 잘 몰라."
[그래서, 나 가지 마?]
"아니 와와. 언제 올래?"
[언제 가도 되는데? 너 연금되어 있다며?]
"... 부탁 해보지 뭐."
[누구한테? 하트씨한테? 퍽이나 들어주겠다. 너 내가 괜히 이 번호 사준 줄 아냐. 다 감시피하라고 사준거야. 하, 눈물 나는 우정이다. 크흡.]
"웃기고 있네. 그럼 어쩌냐. 나갈 방법이 없는데."
[음... 그냥 뒤뜰에서 산책 한다고만해.]
"뒤뜰에서?"
[응. 나 아는 분이 있어서 그쪽으로 갈 수 있거든. 내일 거기서 볼래?]
"와. 진짜? 너도 대단한 가문이구나."
[그래도 윈저나 하트만 하겠냐.]
"나 시골 살던 시절 알면 너도 그런 소리 못할걸."
[지금은 아니옵니다. 전하~]
"아, 꺼져."
[하하하. 그럼 나 내일 오후에 간다.]
"오후에? 수업은?"
[학교 안 나오니까 요일개념 날아가는구나. 내일 토요일이야 임마.]
"아, 맞다, 맞다. 알았어. 그럼 내일봐."
[응. 도착하면 문자할게.]

 


-

 


 집무실에 앉은 해리는 안경을 쓴 채로 노트북을 내려다보며 여러 문서들을 검토하다가 문득 하루 종일 너무 조용했던 것이 생각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선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오전에 홧김으로 배터리를 뽑아놓고 그마저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배터리를 꽂아 넣고 전원이 켜지는 동안 미처 검토하지 못한 문서들을 보는데 잠시 후 전원이 들어온 핸드폰의 화면위로 '부재중 통화 3건'이 떠있었다. 목록을 살펴보니 저는 모르는 번호였고 혹시나 하여 전화를 걸어보니 [상대방이 통화중이라 음성메세지로...]라는 안내멘트가 나왔다. 눈살은 살짝 찌푸리던 해리는 흔한 스팸성 전화려니 하고 목록을 삭제했다.
 그리고 메시지 함에는 그리 달갑지 않은 제 누이의 문자가 한통이 더 와있었다.


>> 전하께서 답답해하시는 것 같네. 내일은 외출이라도 좀 시켜드려.


 나이 먹은 동생한테 세컨이니 뭐니 조롱할 때는 언제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해리는 오늘 종일 왕을 찾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 시간을 보며 자리에 일어섰다.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잠시 후면 잠들 시간이라 그저 제 업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는 순수한 책임감으로...


'똑똑'

"네-"


 자리에서 일어난 해리는 마침 들어온 한 사람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들어가도 돼?"
"... 들어와."


 말끔한 정장 차림의 해리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그래봐야 30대 후반정도인- 남자가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나 매끈한 손매가 그와 닮았지만 표정은 그보다 훨씬 밝은 편이었다. 해리는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일하고 있는 거 안보이냐? 넌 궁에는 웬일이야?"
"누나가 집에 왔었어."
"....Shit..."
"하하하. 누나가 무슨 소리를 한줄 알고 동생 얼굴을 보자마자 욕이야?"
".... 도무지 오메가들은 단 한순간도 재잘거리지 않으면 몸에 병이라도 생기는 거야?"
"오, 형 그 발언 좀 위험했어. 지금 형이 모시는 왕도 오메가라고. 형의 사랑스러운 제수씨도 오메가고."
"그거랑 같아?"
"같지 그럼 뭐가 달라?"
"... 방금 발현한 사람하고 오래전부터 오메가로 살던 사람하고 같냐고."
"오메가는 그냥 다 오메가지 뭘 또 구분하고 그러세요."
".... 베타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던 거랑.."
"그만해, 그만해. 이거는 뭐 충신이야 팔불출이야."
"뭐??"
"아무튼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
"아, 노려 보지마. 지리겄네진짜."
"말버릇..."
"하하. 길에서 애들이 쓰는 표현을 들었는데 재밌더라고."
"아무튼 왜 온 건데?"
"정보에 의하면 대비쪽에서 움직인 것 같아."
".... 움직이다니?"
"금혼령을 내릴 생각 인가봐."
"..!"
"응. 왕치고는 혼인이 좀 늦긴 했지."
".... 망할 해스캣.."
"그래. 또 해스캣 가문에서 나겠지. 녀석들 윈저에 충성을 다하잖아. 아 이것도 그 학생들이 뭐라고 하던데..."
"뭐?"
"따까리?"

 
 그의 속된 표현에 해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듣기 싫으니 그만하라는 얼굴.


"잠깐만 찾아보고."


 과연 저런 행동이 초등학생 자녀를 둔 귀족의 행실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리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그런 행위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계속 검색하고 있었다.


"존."
"응. 잠깐만."
"존 하트."
"아, 맞다. 따까리. 오, 이런 뜻이구나."
"할 말 다하셨으면 나가세요, 존 하트씨."
"아냐 다 안했어. 아무튼 그 '해스캣가의 쌩쑈'에 우리 가문도 움직일 생각 인가봐."
".... 아무리 힘이 없다한들 윈저 가문의 허락 없이 결혼할 수는 없어."
"아, 당연하지."
"... 윈저가문에서 우리를 좋아 할리도 없고 말이야."
"응. 우리 때문... 이라긴 좀 그렇고, 우리의 영향으로? 그 시골에서 살게 된 건 데 당장에 그 대원군부터도 우리를 싫어하지 않겠어?"


 에그시를 찾으러 갔던 날 리의 눈빛에서 단번에 적개심을 느꼈다. '에그시'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제 왼 손에 끼워진 반지에 새겨진 하트가의 문장만 보고도 그는 적개심을 세웠지. 그때 그의 눈빛에서 '에그시 언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했었다. 정확히는 '에그시 윈저'를...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우리 사촌 이안 기억해?"
".... 기억이야 하지. 안보고 산지는 오래됐지만."
"얼마 전에 딸이 알파로 발현됐데."
"...딸이?"
"응. 귀한일이야 그치?"
"...."
"확실히 왕가에 그림이 되려면 왕이 남자 오메가인 이상 그 부인이 알파형질의 여성이 그림이 되지 않겠냐 이거지. 게다가 하트가 다 같은 하트냐고. 최소 우리 집하고 연락도 안하는 이안네라면 윈저가에서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어? 사진을 보니 얼굴도 반반하더라고."
".... 이름이 뭔데?"
"록산느. 16살이래."
"...어리네."
"왕이랑 고작 3살 차인데 뭐."
"...."
"형이랑은 30살 차이고."
"뭐???"


 뭔 쓰레기 같은 소리를 지껄이느냐는 듯 잔뜩 구겨진 인상을 보며 존은 한참을 웃어댔다.


"으하하하하하."


 그 웃는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속이 뒤집어진 적이 있을까. 그 웃는 얼굴의 의중을 파악해버린 해리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눈앞에 있던 빈 종이컵을 한주먹으로 구겨 존에게 던졌다. 정확히 머리에 맞았음에도 그는 웃음을 완전히 그치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더 이었다.


"아 웃겨. 꿈 깨 형."
"... 넌 오늘 제삿날인줄 알아라."


 해리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둔 장우산을 들었고 그 모습에 존은 '히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 의미도 없는 짧은 추격신을 펼친 해리는 궁앞에 주차된 세단에 동생이 웃으며 올라타는 것을 보고 들고 있던 장우산을 바닥으로 내팽겨쳐 버렸다.


"빌어먹을..."


 동생이 오기전까지만 해도 에그시를 한번 찾아가려던 자신의 계획도 잊은 채 해리는 어느새 깜깜해진 밤하늘 아래 혼자서서 애꿎은 잔디만 짓이기고 있었다.






9.



 한낮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제법 찬바람이 분다.
 2층의 테라스에 앉아 궁에 딸린 정원을 내려다보며 바람을 느꼈다. 차가워진 바람에 따뜻한 차의 조화는 언제든 반가운 것이었다. 물론, 제 앞의 이 사람을 빼면 말이다.


"용안을 뵙기가 하늘의 별보기 보다도 어렵습니다. 전하."


 대비는 손에든 찻잔을 들어 소리 없이 가볍게 차를 넘겼다. 에그시는 그 행동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제 앞의 찻잔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기도 전에 대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사실 전례대로 먼저 세자가 되셨다면 세자 비를 얻으시고 함께 즉위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조금 늦은 감이 있지요."


 대비의 말에 사례가 들릴 뻔 했지만 간신히 차를 넘긴 에그시는 잔기침을 하고 대비를 바라봤다.


"19살이 늦나요."
".... 늦지요. 전하 제가 몇 살에 왕가에 시집을 왔는지 아십니까."
"... 들은 적이 없어서요."
"아... 그 뉴스... 에서도 나오고 그랬는데..."
"제가 집에 있을 때도 뉴스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가끔 인터넷 기사만 보고..."
"흠흠. 아무튼. 제가 시집왔을 땐 16살이었습니다."
".....와... 싫으셨겠어요."
"네?"
"나 16살 때 뭐했지? 전 놀기 바빴거든요. 사실 그때 운전을 배우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반대해서 배우진 못했어요. 왕실에 들어오면 배울 줄 알았는데... 주변에 물어보면 뭐가 필요 하냐, 태워다 주겠다, 이런 사람들뿐이니 뭐..."
"하..하하...네. 그러셨군요."
"답답하지 않으셨어요? 16살에 궁으로 들어오는 거."
"....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후우...."


 에그시는 티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비마마."
"네."
"저도 제가 왕에 어울리는 재목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 그게 무슨.."
"그냥 노력할 뿐이지요.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네...."
"가문의 영광 같은건 모르겠습니다. 그저... 좀 답답해요."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는 에그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게 말하자면 조금 안쓰러웠고 솔직히 말하자면 촌티가 났다. 저가 생각한 그대로 아직 그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 그. 전하."
"네."
"전에 제 향을 맡으시고 어지럽다 하셨는데 기억하십니까."
"아.... 네."
"지금도 어지럽고 그러십니까?"
"아, 지금 혹시 향을 푸셨습니까?"


 대비는 항상 아주 미약하게 제 향을 뿌리고 있었다. 한 번도 완벽히 감춰 본적이 없는 삶이었다. 특히 오메가들의 앞에선 그들의 부러움을 받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자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라도 제향을 풀어내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로는 아니지만 약하게나마 향을 풀었는데...


"아, 아니요. 거의 안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혹시나 제가 어지러울까 배려해주신 거라면 감사합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상극의 향기끼리 만나면 안 좋은 반응을 보인다기에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눈앞의 왕은 너무도 태연했다. 느끼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그의 반응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그나저나 전하의 수련도 잘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전하의 향이 전혀 나질 않습니다."
"네. 요즘은 좀 집중해서 잡아보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럴 이유가 있으신가요?"
"학교에 가고 싶어서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에그시의 말에 대비는 경직된 웃음을 보였다. 그는 별로 그것엔 신경 쓰지 않는 듯 휴대폰을 열어 시계를 보고는 테라스너머의 뒤뜰 쪽에 자꾸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대비는 문득 제 조카 녀석이 오늘 이 시간쯤 뒤뜰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달라 청했던 것이 생각나 몰래 미소 지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 가시려고요."
"네. 전하께 드릴 말씀을 전했으니 이만 가야지요."
"저... 대비마마."
"네. 말씀하세요."
"그냥 궁금한 건데...."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왕도... 연애결혼이라는 걸 할 수 있습니까? 상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 말에 대비는 왕과 절친 이라는 제 조카가 생각나 미소 짓고 싶었지만 속을 들킬까 싶어 바로 질문을 던졌다.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꼭 품은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럽니다."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평민과는 아니 됩니다."
"....."
"평민과의 결혼을 꿈꾸다 왕위를 아예 내려놓은 선대왕도 있으시니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됩니다."
"네."
"하지만 상대가 명망 있는 귀족가문이라면 연애결혼도 가능합니다."
"....그래요?"
"네. 전하와 나이대가 비슷하고 왕실에서 인정한 가문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아...."


 에그시의 표정은 이도저도 아니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그저 가만히 제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는 손을 들어 손톱까지 물려고 하는 행동에 대비가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살짝 ‘톡’소리가 나게 때렸다.


"...?"
"손톱을 무시는 행위는 안 됩니다."
"아... 네, 저도 모르게."


 대비는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에그시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에그시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 눈에 띄는 한숨을 쉬며 고민에 빠졌다.



-



"어딜 가십니까?"
"악, 깜짝이야!"


 뒤뜰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에그시는 계단뒤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그 계단에서 구를 뻔했다. 겨우 난간을 붙잡고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아, 해리."
"네. 전하."
"깜짝 놀랐잖아요."
"놀래셨다니 송구하옵니다."
"근데 거기서 뭐해요?"
".... 그... 전하께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요?"
"네. 아무래도.. 바깥공기를 쐬지 못하신지 오래되신 것 같아 산책을 나설까 했습니다."
"아, 그.... 지금이요?"
"네.... 무슨 일이라도."
"아니요. 그냥... 아... 저도 답답해서 뒤뜰에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제가 안내 하겠습니다."
"해리가요?"
"네."
"아...."
"불편하십니까?"
"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뒤뜰이라곤 하지만 제가 서있는 곳에선 좀 멀어 보이기도 했고 정확히 그 입구가 어딘지도 몰랐던 에그시는 입구까지만 해리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왠지 거기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같이 가요 그럼."


 고민을 하다가 같이 가자는 말을 하는 에그시를 해리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람을 쐬자며 밖으로 나가자 할 줄 알았는데 고작 뒤뜰이라니... 그것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아마도 제 형질을 아직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조심히 행동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전과는 다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도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지만 만약 다른 곳에서 다른 알파의 향이라도 맡게 된다면 그가 어떤 반항을 보일지는 저도 상상할 수 없었다.


 길을 모르는 에그시가 앞장서 걸으며 간혹 뒤를 돌아보았고, 해리는 그 뒤를 따르며 에그시가 돌아볼 때마다 이쪽이라며 긴 손을 뻗어 길의 방향을 잡아줬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대화도 별로 없이 오히려 발에 밟히는 풀이 쓰러지는 소리만 감상했을 뿐이었다.


 서로의 향이 나질 않는데도 에그시는 해리가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 찰리의 말대로 라면 자신을 구워삶는 그 하트가문의 중심에 저 사람이 있을 것인데 해리는 한 번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을 보인 적이 없었다. 뭐...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하는 잔소리들은 많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 옛날생각이요."
"사가에 있을 때를 말씀이십니까."
"음... 네. 대략 그쯤."


 해리와 처음으로 만났던 순간이 생각났다. 궁에서 저를 잡으러 온줄 알고 - 물론 잡으러 온 것이 맞긴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으니까 - 도망치다가 발목을 접질렸고 그때 해리는 자신을 보자마자 확신에 찬 얼굴로 제게 인사를 했었다. 직접 걸어내려 가겠다고 오기를 부리다가 그 등에 업히기도 했지... 와, 정말. 나 업혔었네. 이 사람한테...


"다 왔습니다."


 해리의 말에 정신을 차려본 곳은... 제가 생각한 뒤뜰이라기 보단 영화 속에 나오는 비밀의 정원 같은 곳이었다.
 그 거대한 위용 앞에 잠시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해리가 옆으로와 한쪽에 달린 철문을 살짝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아! 저..."
"...네."
"어... 혼자 들어가 볼게요."
"혼자요?"
"네. 어... 그냥 혼자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하하."
"제가 불편하신 거라면..."
"아니요!"
"...."
"해리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냥... 혼자 가만히 있어보고 싶어요."
"... 물에 들어가시는 건 안됩니다."
"알고 있어요. 나올 때 뻔히 티 날 텐데 그러겠어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죠."
"먼저 가셔도 되는데..."
"전하께서 자택을 나오실 땐 반드시 제가 동행해야합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혹시 안에서 길을 잃으시거든 전화를 하시거나 큰 소리로 부르시면 됩니다."
"... 해리는 저를 너무 어린애로 보는 것 같네요."
"... 제가 어찌 감히 전하를..."
"알았어요."


 에그시는 해리에게 장난 스레 웃어 보이며 반쯤 열려진 철문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다 코너를 돌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해리는 그 뒤를 지켜보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수풀이 우거진 벽에 살짝 기대 팔짱을 끼고 섰다. 뒤따라오며 보인 그 작은 어깨가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



 높다란 수풀장벽 아래로 작은 오솔길까지 에그시는 제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것도 잊은 채 그 풍경에 취해 이곳저곳을 걸어보고 있었다.


'지이잉-'

"여보세요?"
[어디야?]
"안에 들어왔어. 여기 생각보다 엄청 크네."
[나 분수대 근처에 있어.]
"... 거기가 어딘데?"
[나참. 주변에 뭐 보여?]
"이게.... 아야!"
[왜? 뭔데?]
"아, 장미였네. 꽃이 져서 못 알아봤어. 이쪽 전부 장미 덩굴인가본데?"
[아~ 그럼 그 덩굴 따라 쭉 걸어와서 갈림길 나오면 오른쪽 길 따라 오면 돼.]
"와, 너 어떻게 알아?"
[응?]
"여기 나름 우리 집이야. 어떻게 니가 더 잘 아냐?"
[아... 그... 아는 분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몰래 따라오고 그랬거든.]
"그래? 정작 나도 못 와봤는데."
[암튼 얼른 와.]


-


 평소보다 정갈한 차림을 한 찰리는 제 소매 끝의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며 옅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저를 발현시킨 사람에겐 누구나 쉽게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나는 그를 사랑하는척하며 그 마음을 제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왕의 이름으로 인사권을 가지고 해스캣사람들을 주요 인사에 세운다면 언젠가 하트가의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잘만하면 그 위에 오를지도 모르지.  


"찰리."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에그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현했다더니.. 향이 안 나네?


"에그시."
"야~ 너 오늘 어디 가냐? 빼입고 왔네?"
"아...응. 오전에 약속이 있었어."
"무슨 약속? 뭐냐, 소개팅이라도 했냐?"
"아, 뭐래."
"그렇지 않고서야 뭐 이렇게 멋있게 빼입었냐 이거야."
"... 에그시."
"응?"


 자신을 보는 에그시의 눈빛이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를 보고도 반응이 없어? 게다가 어째서 아무 냄새도 나질 않는 거지?


"나 멋있냐?"
"미친. 뭐래."
"니가 그랬잖아. 멋있게 빼입었다고."
"응. 니 옷이. 너 말고."


 에그시는 장난스럽게 찰리의 어깨를 치고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그 아래 찰방거리는 물에 손을 담가 흔드는 둥 뻔한 장난을 쳤다. 그 모습을 본 찰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왼쪽에 앉아서는 에그시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왜?"
"그냥. 너 좀 다르다."
"나? 어디가?"
"글쎄... 잘 먹었냐?"
"먹기야 잘 먹지. 얼마나 다채로운지 먹고 싶은 음식이 따로 생각이 안날정도야."
"그래?..."
"... 너 왜 그러냐. 사람 이상하게."
"아니... 그냥..."


 찰리는 작정한 듯 자신의 왼손을 들어 그의 얼굴로 천천히 가져갔다. 그리고 제 손이 그 얼굴에 닿기 바로 직전 에그시의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해?"


 그래. 확실히 불안해하고 있다. 아직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지만 제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없을 것이다. 그저 상대의 행동으로 저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겠지. 초반엔 누구나 그렇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땐 그랬다.
 손목이 잡힌 채로 마주쳐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그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제 형질을 살짝 풀어내며.

 갑자기 느껴지는 알파페로몬에 에그시의 눈이 커지는 것이 코앞에서 보인다. 제 페로몬을 느꼈음에도 신기할 정도로 참아내고 있는 점이 기특했다... 자신의 형질을 풀어내지 않는 것에 집중한 것인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빠졌다. 그래, 이래야 오메가답지.


"찰리 잠...잠깐만."
"응..."


 내가 이렇게까지 다가가는데 물러서지도 못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너 내가 싫으면 물러나면 되잖아. 설마 내 페로몬에 취한건가. 그렇다면 더 풀어주고.

 에그시의 힘없는 손이 얹어진 채로 공중에 뜬 제 손으로 에그시의 얼굴에 가만히 손을 대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핑크빛 입술을 살짝 쓸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서야 에그시의 향내가 풍겼다. 그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저에게 밀려오는 얕은 향기가 그러지 말라고, 무섭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을 때 더 깊은 향기가 밀려왔다.
 그는 깨물어 주고 싶은 목화 향이었다.



-


 해질녘이 되니 어느새 바람이 차가워졌다.
 해리는 품속에서 한동안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는데 어찌나 바람이 불어대는지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에 실린 목화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벌써 목화 꽃이 필 때가 되었나... 해리는 가만히 서서 입에 물린 담배를 빼고는 제 코끝을 간질이는 목화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괜히 포근해져오는 향기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젠가 왕에게 목화향이 피거든 데려 가겠다 했던 일이 떠올랐다. 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한 번 더 끼쳐오는 목화 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화 향에... 날이 선 알파의 페로몬이 섞여있었다.

손끝의 담배가 바닥에 버려졌다.



-



"에그시..."
"...하...안 돼...안 돼 찰리..."
"....에그시..."


 갈수록 짙어지는 에그시의 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달콤한 향기라고 생각했던 그 향내가 진해지면서 점점 제 자신을 휘감았다. 단순히 입술만을 탐하려 했는데 지금 저의 입술은 에그시의 목덜미에 묻혀있고 그 얼굴을 잡았던 손은 에그시의 허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흐...으윽...찰리 그마...그만해.."


 마지막 이성이라는 듯 쥐어짜듯 말하는 에그시의 입술을 다시 입으로 막아버렸다. 처음 마주했던 입술은 달콤했지만 지금의 것은 흉폭 했다. 오로지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들끓었다.



-



분수대방향이다.
갈수록 진해지는 목화 향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낯선 알파향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이런 향기를 맡았던 것 같은데 도무지 어디서 맡아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니,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향이 나는 방향으로 제 힘을 다해 뛸 뿐이었다.


"읏."


정신없이 달리는 중에 장미가시에 찔리고 말았지만....
...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



 찰리의 향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향내에 있는 그의 마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오로지 널 갖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페로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러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젯밤은 오로지 향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자다가 악목을 꾸고 깨기까지 했는데....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일까.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그의 손이 점점 옷깃을 잡아 빼려 한다. 제 손으로 밀어내려 하니 형질을 더 풀어가며 자신을 제압하려 한다.

 '제대로 뿜어내기만 하면 다른 열성의 알파들은 전하 앞에서 꼼짝도 못할 겁니다.' 마음껏 뿜어내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면?
 '서로 치고나가듯이 향기가 상승하게 되면 전하께서 안좋게 생각하셨던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발 그만해 찰리..."


 그는 이제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강한 페로몬이 제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밀어내려고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더 강한 페로몬이 뿜어졌다. 그때 제 아래에 피가 쏠리며 뭔가 울컥하고 밀려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에 간신히 잡고있는 이성과는 다르게 동물처럼 반응해오는 제 몸이 싫었다.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걸 해리가 어떻게 장담해요...'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해리..."


울고 싶었다.


"해리. 도와줘요..."


아니, 울고 있었다.


"해리..."
"에그시."


 눈앞에 찰리의 무서운 얼굴이 보였다.


"지금 누굴 부른 거야."
"...찰리. 그만해 제발.."
"... 지금 누굴 부른 거야."
"우리 친구잖아. 안 그래?"


'짝-'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바닥에 쓰러진 채 제가 맞았다는 충격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찰리가 제 위로 올라탔다.


"그만해... 그만!!"
"한 번 더 불러봐 그 이름."
"찰리 제발 그만해!!! 윽.... 해리!!!!"


 소리치는 에그시의 눈앞에 한 번 더 불이 번쩍였다. 아픔보단 서러움이 밀려왔다.


"전하!!!"


 귀 속이 웅웅거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운 채로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 샌가 제 위에 무겁게 올라타져 있던 것이 끌어내려졌고 근처 어디에선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는듯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왕이 되었고, 어느 날 오메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뿐인 친구는 저를 노리개 취급했다.

 에그시는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럽게 울어댔다.



 곱게 넘긴 머리가 땀에 젖어 흐트러지도록 제 군주의 위에 올라탄 자를 응징했지만 등 뒤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피떡이 되어있는 녀석을 다시 한 번 걷어찼지만 그녀석의 고통에 찬 신음이 한 번 더 터지도록 서러운 울음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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