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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에그시] 감성정치 上

해리에그시로 총리와 비서실장의 관계 1


알오au, 정치알못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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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319,832 자





1.


여러명의 참모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각계의 전화를 받고 서류를 나르는 혼잡함 속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해리는 조금 떨어진 자리의 책상에서 저와 관련된 기사들을 보고받고 정리하는 에그시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침의 정갈했던 모습과는 달리 언제부터인지 자켓은 벗어서 의자에 걸어뒀고 단정했던 소매는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올려져 다부진 팔 근육라인이 그의 동작에 따라 보일듯 말듯 했다.


"5분전입니다."


옆의 다른 비서의말에 정신차리기도전 에그시의 고개가 들리며 저를 향했다. 마주친 올리브색 눈빛은 잠시 동그랗게 뜨였다가 저의 시선을 느끼곤 가볍게 휘어진다. 손에들린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저에게 다가와 마주선다. 아무런 기척도 하지 않았지만 마주서서 타이를 잡아주던 스타일리스트는 조용히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제 타이를 다시 잡아온다.


"대본은 다 보셨습니까?"
"다 외웠지만 혹시 모르니 들고 나가는게 좋을까?"
"자신 있으시면 빈손으로 나가셔도 좋아요. 불안하시면 프롬프터를 띄울게요."
"불안하지 않으면 안 띄우고?"
"흐음..."


장난스레 흘기는 눈빛이 볼만했다. 타이 정리가 끝난건지 작은 손은 아래로 내려와 정장 단추를 다시 여미고 들릴듯 말듯 속삭였다.


"그때처럼 당황하고 싶으신건 아니죠?"


그때?
어떤 시점을 말하는건지 시선을 돌리며 눈살을 찌푸리던 해리는 과거의 한시점이 떠올리며 피식소리를 내고 웃었다.
그리고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나를 제외한 두명의 경쟁자에게 공개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그런 장난은 안하는게 좋을것 같은데."
"읽어도 무슨말인지 모를텐데요, 저 꼰대들은."
"대선출마 발표에 그 문구를 내가 읽을뻔 한건 알고 있고? 오늘은 눈과 귀가 많은 날인데, 기자들한테 알리고 싶은건가?"
"그래도 되든 안되든 소문내고 싶은건 사실이죠."


해리의 자켓카라를 살짝 쥐어 잡아당긴 에그시는 까치발을 하고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 나라의 총리가 되실분이 저한테 마음이 있으시다는데 그 누가 숨기고 싶겠어요."
"아직은 아니지."
"어느쪽이요? 총리가? 아니면 마음이?"


손을 놓고 짐짓 흘겨보는 눈빛에 말문을 떼려는 사이 이어마이크를 찬 관계자가 뛰어와 다급하게 알렸다.


"지금 올라가셔야 합니다."
"알았네."
"잘되실 겁니다."


어느새 정갈하게선 멋스러운 청년이 저를 곧게 바라본다.


"고맙네. 안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고."
"그럴일은 없을겁니다."
"...."
"제가 지지하는 분인데요."


저보다 더 자신감있게 말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대기실 문을 나섰다. 복도를 나서 다른대기실에서 나온 후보들과 인사치례 악수를 하고 무대로 향한다. 마지막 출입문을 마주하고 겨우 고개를 돌렸을때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 어느새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청년이 저를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사람들 틈으로 보일락말락 해지자 까치발을 든 청년이 고개를 한껏 처 들고 한손으로 입가에 손을 대고 소리없이 입모양으로 사인을 보냈다.


'I trust you'





---
4년전
---



"시장님께서 더 좋은 입지를 갖게 되실 겁니다."


아직 어린아이의 태를 다 벗지 않은, 어설픈 정장의 청년이지만 눈빛은 그 누구의 것보다 자신감이 넘쳐있었다.


"지금은 안좋다는 얘기 인가요?"
"아니요, 충분히 좋으시죠. 이보다 더 큰 이상이 없으시다면 말입니다."
"더 큰 이상이라면?"
"저는 시장님께서 단지 시장직에 만족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얼굴에 가까스로 걸려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절로 가늘어지는 눈매를 보며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더 큰 일을 하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지금도 충분히 큰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시민을 넘어선 국민에 대한 책임이라면 어떠신가요?"
"...."


총리가 된다는건 단지 개인의 역량으로 가능한것이 아니었다. 모든 정치가 그러하듯 적당한 집안 배경과, 오랜 전투를 이끌어갈 재산과, 주변을 안정적으로 지켜줄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충분이 믿을 수 있는 사람. 개인의 이권보다 진짜 국민을 위해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를 지지해줄 수 있는 그런 양보의 미덕을 동시에 갖출 수 있는 사람. 정치권에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센 권력에 붙어 자신의 이권을 챙기거나 스스로가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남을 보좌하기위해 한걸음, 두걸음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치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함부로 곁에 둘 수도 없었다.


"에그시 언윈 입니다."


젊음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순수히 나라를 걱정하고 그 마음으로 자신과 가장 잘 맞는 정치색을 가진 정치인을 찾아 움직일 수도 있다. 이권이나 권력앞에 조금은 순수할지도 모른다.


"제안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문서들이 앞에 놓였다. 잠시 눈을 내려 서류를 보다가 시선을 올려 청년의 눈을 마주했다.
창문넘어로 내리는 햇살을 받은 올리브색 눈빛이 반짝이며 저를 향한다. 저시절의 자신도 저런 눈빛을 가졌을까 궁금했다.


"읽어보고 연락드리죠."
"다 읽어주실때까지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예쁘게 웃는구나.
저보단 제 아들의 나이에 더 가까워보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마음에 동했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데도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다음약속이 있어서요. 다음주까지는 연락을 드리죠."
"오늘은 화요일입니다. 시장님께선 주중에도 주말에도 일정이 전부 있으시구요, 따로 문서를 읽어볼 시간이 없으시다 말씀하시는 거라면 오늘 밤에 직접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밤이라... 저녁도 아니고 밤이라니.
여전히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오늘 밤은 어렵겠네요. 우리아들이..."
"기숙학교에서 돌아오시는 날이죠. 걱정마십시오. 아드님은 친구분들과 저녁9시부터 약속이 있으시더라구요."
"....."
"그 클럽을 제 지인이 운영해서 우연히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모님께선 모로코에 계시죠?"


그제서야 향이 피었다. 달큰하기 짝이없는 오메가의 페로몬.
그 어이없는 유혹에 헛웃음이 나왔다.


"돌아가시죠."
"네, 그리고 저녁에 다시오겠습니다."
"오셔도 저는 여기 없을겁니다."
"아, 물론 사무실로 오진 않을겁니다."
"...."
"오늘 꽃축제 행사장에 가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엔 지역구 의원분들하고 저녁식사가 있으시죠."
"그 약속 장소는 어디에도 알린바가 없을 텐데요."


그는 향을 감추며 말갛게 웃었다.
아주 잠시 맡았던 향일뿐인데 얼마나 중독적인 향이었는지 다시 맡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도 저를 보실겁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는걸 알게되는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밤 저는 마치 이렇게 될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 향기로운 페로몬에 취했다. 며칠간 그 향기를 잊지 못할정도로.





---





몸에 걸쳐졌던 번호띠를 받아든 에그시는 감흥없이 번호띠를 곱게 접어 책상위로 올려두고는 새로운 서류를 가지고 와 저에게 안내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보던 해리는 헛기침을 몇번 하는것으로 그의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하게 했다.


"긴장이 전혀 안되는 모양이구나."
"긴장이요? 설마, 제가 이런 경선에 긴장할것 같아요?"
"어째서?"
"아까 환호성 들으셨죠?"
"들었지."
"그럼 뭔가 감이 안오세요? 아, 이번에 되겠구나."
"그래도 정치인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지."
"대충하시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당연히 최선을 다하셔야죠. 그래야 총리가 되시죠. 자, 여기 마지막 연설문 확인해보시고 입에 붙는지 읽어보세요."


대본을 주고 등을 돌리는 에그시의 팔을 가볍게 잡아 돌려세우고 목소리를 낮췄다.


"네?"
"만약 내가 안되면."
"안되지 않는다니까요."
"그래도 만약 이란게 있다."
"네, 알았어요. 만약에 안되면 뭐요?"
"그땐 어떻게할 셈이냐?"
"뭘요?"
"네가 만들어준 정책들 말이야."
"흠...."


고민하듯 한손으로 깨끗한 턱을 문지른다. 삐쭉거리는 핑크빛 입술이 자뭇 사랑스러웠다.


"솔직히 그런 생각 안해봤는데."
"지금 해봐."
"흐음...."
"다른 후보한테 가져다 주면 되지 않을까?"
"....하트 후보님."
"그래."
"다른 사람이 과연 그 정책을 받을까요?"
"그건 모르지. 시도해보지 않았으니까."
"이미 그 정책의 이름 앞에 해리하트라는 이름이 한번 붙었었는데?"
"같은 당내의 정책이니 가져다 써도 나쁠 건 없지."
"글쎄요. 조지는 옹졸한 사람이라 절대로 그런짓을 할 것 같지는 않고."
"목소리가 크구나."
"윌리엄은 재미없는 사람이라 문화예술계 정책은 원하지도 않을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 엄청 싫어하잖아요. 둘다 안쓸거예요."
"그럼 내가 안되면 그 좋은 정책들은 사장되겠구나."
"네. 그렇겠죠."
"아까운일이네."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해보이자 에그시의 입에서 '피식'하는 소리가 나며 얼굴이 피었다.


"내가 괜히 후보님을 찾아왔겠어요?"
"글쎄, 전엔 잘생겨서 찾아왔다며."
"뭐 그것도 있고."
"그리고."
"난 될 것 같은 수가 아니면 안써요."


실제로 피지 않은그의 향기가 코 끝에서 간질거렸다.


"내가 그정도로 얕고 쉬운 사람인 모양이지."
"왜요?"
"당연히 너에게 넘어갈거라고 생각했으니 나에게 왔다는 얘기가 되니까."
"음.. .그건 아닌데."
"그럼?"
"그냥... 내가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눈살까지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경선결과발표 30분전입니다. 무대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관계자의 목소리에 따라 테이블위에 접어둔 번호띠가 다시 해리의 몸위로 드리워졌다.


"경선은 신경도 안쓰여요."


긴장한 모습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


"진짜는 대선이죠."
"그렇지."
"세달뒤면 총리가 되시는겁니다."
"...."
"전 그냥 청소부 자리라도 하나 주세요."
"청소부?"
"아무책임도 없이 총리옆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에게서 반걸음정도 물러서서 몸을 돌렸다.


"청소부 자리는 T.O가 없구나."


그말에 에그시는 피식소리를 내고 웃으며 뒷짐을 지고 두걸음 물러섰다. 조금 떨어진 그는 아무상관 없다는듯 저에게 맑게 웃어보인다.


"내가 믿을 사람이 없어서 한가지 부탁할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둘 사이의 거리가 세걸음정도 멀어지면 둘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격식을 입는다.


"비서실장의 역할에 대해 공부를 미리 해두면 어떨까 하네."
"....네?"


약간 멍해진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대기실을 나섰다.
벌써부터 낙심한듯한 표정의 두 후보들을 지나 무대에 오르고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단상에 올랐다. 뒤돌아본 자리엔 에그시가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 연설문을 읽기위해 자리에 올랐을땐 자연스럽게 가는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저녁식사로 달콤한 복숭아 어떠세요?]


하마터면 또 그 망할놈의 프롬프터를 그대로 읽을뻔 했다.






2.


무대위에 선 해리는 완벽했다. 시장시절에도 그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총리대선을 앞두고 압도적인 표차이로 경선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단상위에서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났다. 그의 외모가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그 위치가 저 사람을 더 빛나게 하는 거겠지.


'비서실장의 역할에 대해 공부를 미리 해두면 어떨까 하네.'


중책을 원했던것도 사실이고, 최소 비서실에서 일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비서실장 자리를 제안한것에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저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이다. 워킹클래스에서 태어나 변변치 않은 학력과 별볼일없는 전공, 그나마도 중퇴. 그런 저가 저런 권력을 실제로 가질 수 있을거라고는... 저 해리하트라는 인물을 알기전엔 꿈도 꿔보지 못했다.

가정이 있으나 화목하지 않은 워커홀릭. 그를 만나러 가던날 에그시는 거울앞에 몇번이나 섰다. 어차피 완벽해 보일 수는 없으니 젊음으로 청량함으로 몇번이나 무장을 하고 그를 마주했을때 그 짙은 갈색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큰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이 사람을 총리로 만드는 거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져야겠다.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제가 내민 문화예술 정책이나 안보안건등에 대한 내용들은 그의 정치사상과 방향을 같이했고 그런 안건을 하나라도 더 내밀 수록 해리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또 품어주었다.

역대 비서실장에 오메가가 앉았던 적이 몇명이나 될까?
에그시는 비서실장의 역할보단 엉뚱한 것을 검색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훑었다. 이번에 자신이 비서실장직에 오른다면 오메가로써는 8번째일것이다. 40년 전만해도 투표권조차 없었던 오메가가 총리의 최측근에 서서, 그것도 비서실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권력을 갖게 된다. 온몸에 끼치는 전율에 에그시는 잠시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뱉었다. 그에겐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걸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듯 표현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것에 발목잡힐 생각은 없었으니까. 저에게 필요한건 권력과 그 권력을 통해 얻어지는 부의 축적이었다.

이제 청문회를 준비하면 되는건가.
착하고 순수한 얼굴로.
아마도 이러한 순간들을 위해 연기를 전공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해리의 차문을 열어주고 선 에그시는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예쁘게 미소지었다.


"자네도 수고 많았네."


주위에 보는눈이 많았다.
해리를 지지하는 시민들과 기자들에 둘러싸여 그는 인사치례로 다정하게 미소짓고는 에그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 주변의 인파들이 없었다면 서로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노동당의 대표 후보로 선출되신 소감이나 각오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경선장소가 아닌 곳에서 인터뷰를 받지 않으려는 당초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기자들은 언제어디서든 자신들이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도 매우 뻔한 질문으로 혹시나 다른 대답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에그시는 해리 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마이크를 살짝 밀며 기자를 향해 가볍게 미소지었다.


"지지자 분들과 국민들께서 저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거스르지 않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갈한 목소리가 기자의 마이크를 타고 들어갔고 다른 질문이 나오려는 찰나 해리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모인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시민들의 환호성은 그를향한 기대만큼이었고 그 소리가 높아질 수록 기분이 날아갈것 같아지는건 오히려 에그시쪽이었다.

이윽고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수수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과하지 않게 꾸민 그의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닮은 고요한 미소를 띈 기품있는 그녀는 문앞에선 그를 웃으며 맞이하고 가볍게 그를 안았다. 에그시는 그들을 향하는 기자들이나 지지세력들의 돌발행동을 막으면서도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정신없이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지워지질 않는다. 주변에 손인사를 해보이던 해리의 시선은 이윽고 다시 저에게 닿았고 그는 가볍게 미소짓고는 대문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눈앞에서 그가 없어지자 사람들의 격렬함은 이전의 절반으로 줄었다.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경호원들을 시켜 주위를 경계하도록 지시하곤 자신도 골목을 빠져나가 준비되어 있던 검은 차에 올라탔다.


부인과 자식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그를 봤음에도 기분이 나빠질 일은 없었다.
집에 들어선 그가 그의 부인에게 다정한 키스라도 건넬 것 같은가? 혹은 그 아들이 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할 것 같은가?  


"영부인 되실분이 정말 기품있지 않아?"
"너무 멋있는 부부야. 저 두분이 이 나라의 대표가 되면 내가 다 자랑스러울 것 같아."
"총리가 되고 나면 아마 세계에서 가장 잘 생긴 국가원수 1위에 선정될거야."
"가장 아름다운 국가원수 부부로도 1위야."


지나가던 시민의 말을 듣고 에그시는 피식소리를 내고 웃었다.



-



제손으로 자켓을 벗은 해리는 거실을 스쳐 드레스룸으로 향하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안 나올줄 알았는데."
"내 이미지도 있으니까."
"다니엘은?"
"방에있어. 놀러나가고 싶다는거 집안 이미지 때문에 겨우 잡아놓은거야. 아버지가 총리후보가 된다는데 아들이 어디 클럽가서 술먹고 놀고 있다는게 알려져봐야 좋을게 없으니까."
"고마워."
"당신생각해서 그런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말고."
"그래. 왜 아니겠어. 그래도 결과적으론 나에게 고마운 일이니까 그렇다고 한거야."
"그래, 알면 됐네."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자켓을 걸어놓고 넥타이를 풀어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이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문득 제 번호띠를 받으며 밝게 웃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외도도 이런 외도가 없지.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대외적인 이미지때문에 겉으론 가정을 유지하고 뒤로는 다른 오메가를 만났다.


'사모님은 정말 복받은 사람이예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것 같지 않은데'
'아니면 가진게 너무 많은 사람이라 해리같은 알파와 사는게 복인지 모를정도로 완벽한 사람이겠죠.'
'그건 맞는것 같구나.'
'난 당신 하나도 온전히 갖지 못하고 이런 단편적인 시간말곤 당신의 일부도 가질 수가 없는데...'


맨살을 맞대고 품에 안겨 속삭이던 청년의 목소리는 그 페로몬 만큼이나 달콤했다.
그 말을 듣고도 아무말없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으니 그는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해보인다.


'그렇다고 이혼하라거나 한건 아니었어요. 알죠?'
'.... 그래. 수도 없이 말했잖니.'


그제서야 걱정스러운 얼굴이 풀리며 다시 맑게 웃고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손끝으로 예민한 부분을 긁어댔다.


'저는 이 정도도 충분해요.'
'그게 어느정도 인데?'
'아주 가끔... 내가 혹은 당신이 원할때... 당신의 밤을 소유하는 거요.'


그 목소리와 그 손길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감춰둔 페로몬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그시는 자신에게 있어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혹은 정치적으로든 가장 완벽한 파트너였다. 문제가 있다면 대외적으로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너그럽게도 청년의 욕심은 그것까지 차지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에겐 행운이었다.


'지이잉-'

자켓에 넣어둔 휴대폰의 진동소리에 정신이 들어 눈가를 비볐다.


[내일 오전7시반에 집앞으로 갈게요. - peach]


굳이 달지 않아도 되는 사족에 숨소리 같은 웃음이 터졌다.


[내일 일정은 9시부터인데 7시반은 좀 이른것 같구나]
[오늘밤을 양보한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아침부터 힘빼게 생겼군."
"뭐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작게 중얼거린 소리였는데 언제 다가온건지 부인에게 들켜버린 바람에 해리는 헛기침을 하며 별것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손님이 왔어요."
"누구? 오늘은 일정이 없는데."
"당 대표. 아무리 대표라고 저렇게 갑작스럽게 와도 되는거야? 하루종일 차려입고 있어야겠네."


투덜거리며 화장대에 기대서는 그녀에게 사무적인 미소를 띄우곤 그 곁을 지나 응접실로 향했다.



-



"예약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에그시 언윈이요."
"네, 미스터 언윈. 이쪽으로 오시죠."


고급스런 식당에 웨이터도 아닌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에그시는 창가에 따로 준비된 독립적인 공간에 앉았다.


"미리 주문하신 요리로 바로 준비해드릴까요."
"네, 그리고 마티니도 한잔 부탁해요."
"평소와 같은걸로 말씀이시죠."
"네, 따지않은 베르무트로요."


지배인은 살짝 미소지으며 커튼을 열고 나갔다.
야경을 배경삼은 유리창에 둘이 앉아도 충분한 테이블과 제 자신이 비쳤보였다. 누가보면 바람맞고 청승떤다고 하겠지만 그런 것 쯤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늘 저는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를 제안받았고 과거엔 상상도 못할 이런 고급 레스토랑의 프라이벳공간에 앉아 뭘로 만들었는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고급음식을 마음껏 대접받고 있었다. 상류층의 삶 그 자체 였다.


'지이잉'

[아침부터 괴롭힐 생각은 아니지? 내일 부터는 일정이 많은데 말이다.]


그 문자를 보낸게 언젠데...
한참뒤에 도착한 문자를 내려다보며 에그시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두운 창밖을 내려다봤다.


"말씀하신 마티니 입니다."
"네, 감사해요."


웨이터가 물러가고 에그시는 테이블 위에 놓은 휴대폰을 들어 빠르게 문자를 써내려 갔다.


[안하는게 괴로우실텐데요. 원기회복이라고 생각하세요 ^^]


글을 써내려가는 손끝이 간지러웠다.
그를 향한 마음이 이렇든 저렇든 간에 그와의 잠자리 만큼은 일말의 주저함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이렇게 상성이 잘맞는 사람을 그전에 본적이 있을까 싶을정도로 황홀했으니까. 그의 다부진 어깨를 끌어안고 넓은 품에 안겨 손가락을 얽을 생각을 하는것만으로도 손끝과 발끝에 전기가 이는 것 같았다.


"식사 올리겠습니다."
"네."


커튼이 열리고 은색 카트가 들어왔다. 그 뒤로 하얀 모자를 쓴 프랑스인 쉐프가 들어와서 이것저것 음식에 대해 어설픈 영어로 설명을 한다. 저는 무슨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권하는데로 맛을 보고 작게 감탄을 뱉는걸로 역할을 했다.
밤하늘은 짙어질수록 눈부시게 빛났고 입속을 헤짚는 산해진미는 무슨맛인지 느끼기도 전에 목넘어로 사라졌다.
그 어떤 산해진미도 혀끝에 감도는 해리의 향기만 못했다.



그를향한 마음이 진심이냐고?
그 와 자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일부 인정 해야겠지.



-



아침 7시반 집앞으로 마중온 사람은 에그시가 아닌 수석 경호원 이었다. 이후 스타일리스트가 대기중이고 조찬회의가 준비되어 있다는 호텔로 향하도록 에그시는 한통의 전화도 문자도 주지 않았고 제가 먼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전날 축하주라도 먹고 길게 뻗기라도 한걸까.


"이 방입니다."


경호원이 열쇠를 걸어 문을 열고는 몸을 비켰다.


"혼자 들어가라는 뜻인가."
"네, 기밀 사항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이 조금더 빨리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구가 그런 소리를 했냐고 물을 뻔했다.
아침부터 장난이 대단하구나 에그시.



'똑똑-'


객실로 들어서 복도벽을 손으로 톡톡 치는데도 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을 불러놓고 잠이라도 든건가 생각했지만 거실에서 침실까지 널린 그의 옷가지들을 보고 해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들 처럼 길을 안내하는 그의 점점 작아지는 옷가지들을 따라가니 침대위 이불속 봉긋하게 솟은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에그시."


불러도 대답없이 아주 작게 오르락 내리락 하며 숨만 고르고 있다.
침대곁으로 설까하다가 괜히 장난이 치고 싶은 마음에 침실입구 벽에 한참을 말없이 기대고 서있으니 두꺼운 이불이 꿈지럭 거리며 움직인다.


"해리?"


저가 오지 않는다는것에 의문을 품은 그는 고개를 내밀 생각도 않고 이불에 파뭍혀 웅얼거리는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른다. 그 목소리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서있자 에그시는 몇번을 더 꿈지럭 거리더니 이불옆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며 '푸하'하는 답답한 숨을 뱉었다.


"아 뭐예요. 나 못찾고 나간줄 알았네."
"이건 또 무슨 장난이니?"
"장난아닌데요?"
"장난이 아니면?"
"이쪽으로 안올거예요?"
"그림동화를 성인버전으로 풀어놓은 이유를 설명해놓기 전까진 안간다."
"흐음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


다시 이불속으로 고개를 넣은 에그시는 몇번더 꿈지럭 거리다 침대헤드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슬슬 몸을 일으켰다. 아주 느리고 농염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며 이불을 걷어내더니 방안 가득히 그의 향기가 퍼진다. 실오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목에, 손목에 핑크색 리본끈을 묶고 춤을추듯 그의 옆태를 보인 그는 허리 아래가 완전히 드러나기전 동작을 멈추고 저를 돌아본다.


"해리."
"그래."
"아 뭐야. 안해줄거예요?"


그럴리가.
하지만 나도 놀리고 싶었으니까.

그를향해 아주 느리게 다가갈 수록 그는 조금더 몸을 틀며 저에게 시선을 맞췄다. 허리 아래가 아직 이불 속에 있었지만 그 아래도 다른 옷을 걸치지 않았을것임이 분명했다. 늘어져 있는 옷가지들은 침대 맡까지 모두 떨어져 있었으니.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에그시에게 손을 뻗자 그는 마치 어린 강아지처럼 제손에 머리를 대고 얼굴을 기대고 문지르다가 한손으로 손가락 몇개를 접어 잡고는 길게 뻗은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햝기 시작했다. 틈틈히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치다가 입속으로 손가락을 다 넣고 입술로 길게 빨아대는 동작에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진다.


"츄읍"  


혀끝으로 손끝을 털다가 길게늘어지는 타액을 소리내어 빨더니 제 손가락을 여전히 입에 문채로 슬금슬금 몸을 옮겨 가까이 다가 앉는다.


"목석이야 뭐야."


타액으로 범벅이된 입술로 코앞까지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fuck me, harry."








3.




"어디 아프십니까?"
"아, 네 조금..."
"약을 사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그냥 두통이 조금..."


운전석에 있던 경호원은 에그시의 말에 조수석의 서랍을 열어 작은 약상자를 건넸다.


"두통약입니다."
"네... 고마워요."
"그럼 좀 쉬시겠습니까?"
"네, 아무래도 조금..."
"그럼 후보자님 호위는 제가 맡아서 할테니 잠시 쉬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중요한때인데 못볼꼴을 보이네요."
"어제 고생이 많으셨죠. 그럼 잠시 쉬십시오."


경호원이 나가고 문이 닫기고서야 차에 혼자남은 에그시는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몸을 꿈틀거렸다.
어제가 아니고 오늘 아침이야 이 사람아.


"아으..."


작정하고 일저지른건 자신인데도 왜 이렇게 직후엔 후회가 드는지 모르겠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썬팅된 창문넘어로 해리에게 다가서는 경호원이 보였고 둘의 짧은 대화가 오가더니 그의 시선이 저가 보일리 없는 짙게 썬팅된 창문에 닿았다가 살짝 미소지으며 떨어졌다. 시장의 인파속으로 사라지는 정갈하게 빗은 곱슬머리를 보며 에그시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미쳤지..."


경호원이 넘긴 약상자를 뒤집어 눈을 찌푸리고 효능효과 부분을 읽어내려가다 진통제 효과가 있다는 글귀에 바로 옆에 비치된 생수병을 땄다. 느린동작으로 약을 삼키고 뒤로 몸을 기댄 에그시는 허리아래에 느껴지는 진통과 묘한 이물감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하.... 하아... 해리... 그만해요.... 하아...'
'오 에그시... 네가 자초한 일이다.'
'아읏... 잠깐... 아니 또 하려구요? 하....'
'한두번만에 끝날거라고...읏.. 생각했니?'
'다섯번째 잖아요!! 아윽.... 흐읏...'


그가 마지막으로 제 허리를 힘주어 잡아당기며 자신을 밀어넣을땐 정말로 하늘이 노래지는것 같았다.
정신을 잃을것 같아서 가까스로 그 어깨를 잡아 밀며 숨을 가다듬으려 할 수록 그는 짐승같은 숨소리를 뱉으며 허리를 털어댔다. 막판엔 준비해둔 콘1돔까지 떨어져 그대로 안에 싸질렀으니 이 묘하게 불쾌한 이물감은 아직 다 빼내지 못한 그의 흔적일 터였다.


'찰칵'


갑작스레 열리는 문소리에 거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슨일이죠?"
"후보님께서 반대편 출구로 나가실 듯 합니다. 차량이동 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그가 걸어간 쪽을 보니 이미 그를 둘러싼 인파가 많이 멀어져 다른사람들보다 머리하나가 더 큰 그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괜히 좋지 않은 기분이 들어 몸을 살짝 일으키려는 순간 차가 출발했고 이내 시장 바깥 도로에 들어섰다.



-



"자, 여러분. 뒤에서 미시면 안됩니다. 다쳐요."


완전무장한 경호원들이 격렬하게 다가오는 시민들을 저지했지만 몇겹이나 에워싼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겠다며, 악수를 해보겠다며, 이럴때가 아니면 총리될 사람을 어떻게 보겠냐며 저마다 열정적으로 해리에게 달려들었다. 해리가 직접 목소리를 내어 그들을 저지해봐도 그들은 목소리를 들었다며 좋아했고 그가 무슨말을 했는지에 대해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빠져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선 경호실장의 제안에 해리는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며 한걸음씩 자리를 옮겼다. 저가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열기는 과열된 경향이 있었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네네."
"거 밀지 마세요!!"
"아 그참 뒤에 밀지 말라니까!"


경선을 통과한 직후의 선거활동이어서 인지 시민들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밀면 위험합니다. 이동하겠습니다. 비켜주세요. "


경호원의 제지에도 시민들은 휴대폰을 꺼내 그의 얼굴을 찍고 악수를 하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출구가 가까워져 올수록 한걸음떼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사람들에 밀려 출구 반대쪽으로 몸이 밀리자 경호원들이 힘을주어 버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인파가 더 두껍게 쌓이기 시작했다. 후보자를 원래부터 기다리던 지지자들과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다가 총리가 될 후보자를 보고 달려들며 모인사람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호원들은 마침내 사람들과 해리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힘을주어 떼어내기 시작했다.
인기있는 후보였고, 또한 강력한 총리후보자 였기에 어느정도의 인파는 예상했지만 이정도의 규모 일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갈 수록 상황은 조금씩 더 위험해졌다.



-



고작 백여미터를 이동하는 거리를 차로 이동하자니 대로변의 교통체증과 일방통행길의 복합적인 문제로 에그시는 출구를 십여미터 남겨둔곳에서 기사를 재촉했다.


"왜 이런거죠?"
"앞쪽에 인파가 많은것이 차량진입이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진입시키세요. 후보자님이 차량에 타야 하지 않으십니까."
"네, 저도 그러려고 하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일부 사람들이 출입구쪽으로 빠른걸음을 재촉하는것이 보였다. 저 정도 규모는 행사를 알지 못했던 행인들까지 모여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인기후보였고 동시에 유력후보 였으므로 많은 인파는 그만큼의 위험성을 동반했다.


"10분내로 알아서 책임지고 차 대기시키세요."


급하게 차문을 박차고 나간 에그시는 인파가 쌓여가는 출입구를 향했다.



-



"밀지마세요!!"


경호원들의 언성이 높아질때 까지 해리는 여전히 시민들과 웃으며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어주는등 전혀 힘든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인기 비결이기도 했다 .


"하트 후보님!!!"


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무거운 중년의 목소리에 해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방향을 향했고 그와 동시에 '치익'하는 스프레이 소리가 들렸다.


"아악!!"
"내눈!! 누구야!!"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해리를 둘러싸고 그의 머리를 잡아 숙이게 했다.


"길 열어!!!"
"괜찮으십니까?"


이상했다. 분명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했고 스프레이 소리를 들었는데 지척에 있던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것 치고 자신에겐 그 어떤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시발..."


에그시?
경호원들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당장 길열어요!"
"비키세요!!"


고함을 치는 에그시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자신을 둘러싼 경호원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무전소리가 섞여서 들린다.


"차량대기 확인해!"
-(치익) 10m 전방에서 대기중입니다.
"뭘 꾸물거리는거야!!"
-(치익) 인파때문에 차량진입이 되지 않습니다.
"후보자님. 차량까지 직접 가셔야 할것 같습니다."
"상관없네. 헌데 언윈은..."
"비키세요!!"


떨어진 거리에서도 어렴풋이 들리던 에그시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구급대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누군가 코앞에 다가와 건네는 말에 에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좀 따갑긴 한데..."


자신의 팔을 당기는 힘에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주저앉을뻔 했다.


"구급차로 이동하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허리께에 이동식 침대가 닿았고 여러 사람의 힘에의해 침대위로 눕혀져 구급차 안으로 옮겨졌다.
시발, 테러라니...


"보이는건 괜찮습니까?"
"..... 그게..."


그게 문제였다. 갑자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뿌옇게 보이는 공포에 비하면 조금 따가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마저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일시적인 마취성분에 캡사이신이 섞인듯 합니다. 눈 세정할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네.."


그들의 손에 강제적으로 벌어진 눈꺼풀에 미지근한 식염수가 흘렀다. 갑자기 눈에 닿는 느낌에 움찔거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는 감각에 천천히 숨을 고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괜찮은거겠죠?"
"큰 이상은 없겠지만 병원에가서 정밀하게 검사를 받아보셔야 합니다."


진짜 좆같네.
살다살다 별...


"테러범은 잡혔습니까?"
"경찰로 연행되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런던경찰 관할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잠시 연결 부탁드립니다."
"경찰조사후 피해자분에게 따로 연락이 닿을겁니다."
"이보세요."
"...."
"총리후보자를 저격한 테러범입니다. 지금 제가 입은 피해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피해자분께서 좀더 치료를..."
"그냥 피해자가 아니라 총리후보실의 책임비서라고!!!"


눈앞이 점점 더 흐려졌다.
무슨일 생기는건 아니겠지?
조금 진정 되는가 싶더니 점점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조금씩 진정됐지만 신경은 더 예민해졌다.


"경찰서 연결하세요."



-



경호원들의 안내로 병실앞에 다다른 해리는 평소보다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갑작스레 열린 문소리에 놀란건지 침대헤드에 몸을기대고 반쯤누운 자세였던 에그시는 번쩍놀라며 몸을 떨었다.


"누구세요?"
"...에그시."
"아... 해리...아니! 그..."
"괜찮다. 지금 혼자 있으니."
"....네."


붕대로 가려진 눈에 앞이 보이지 않아 상황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는 혼자 들어온건지 뒤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한사람의 발소리가 저를 향한다.


"괜찮은거니?"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 물어오는 목소리에, 떨리듯 제 얼굴에 닿는 그의 따듯한 손길에 왠지 화가났다.
왜 이런꼴을 당해야하지. 그것도 당신때문에.


"네, 오늘하루는 시각을 안쓰는게 좋겠다고 하네요. 일시적인 거래요."
"대체 어떻게 된거니."
"귀족출신의 총리가 어떻게 노동자를 대변하냐면서 오래전부터 해리한테 앙심을 품었던 놈인가봐요. 거기다가 무식해서 약을 어느정도 써야 상대가 당하는지를 모르고 쓰느라 실명이 될 정도는 아니었고..."
"그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거기 있었냐는 말이야."
"....."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에그시의 입이 다물렸다.


"에그시..."
"그냥 기분이 안좋았어요."
"...."
"뭔가 그냥 그런 촉이 있잖아요."


장난스레 입술을 이죽이며 말을 하는데 해리는 몇번이고 에그시의 눈가를 쓸어냈다. 그 손길이 평소와 같이 다정하면서도 묘하게 떨리고 있어 불쾌했던 기분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그걸 네가 몸으로 막으면 어쩌자는거냐."
"...."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다.
인파속에서 수상한 놈을 봤을땐 그 앞으로 다가가 끌어내거나 저지하려고 했던건데...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고 저는 그 순간 그게 단검이나 대충 그 비슷한 흉기라고 생각하고 해리와 그의 사이로 다가가 그를 저지하려했다. 딱 제 눈높이에서 뿌려질 스프레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 에그시."
"괜찮아요. 치료하면 낫는다는데요 뭐."
"...."


자꾸 제얼굴을 쓸어내리는 해리의 손길이 묘했다.
설마 내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해서 그런건가. 그렇게 생각한대도 상관은 없었지만...


"해리?"
"...."
"걱정마요. 그런 악질적인 놈은 징역을 한 10년쯤 처 맞아서..."


갑자기 끌어안는 힘에 말문이 막혔다.
아침만해도 몇번이고 끌어안았던 몸이고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의 어깨선과 목근육까지 낯설지 않은게 없는 몸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느낌이었다.


"걱정했다."
"...네."
"별일없다니 다행이야."
".....네, 의사는 괜찮을거라고..."
"앞으론 그러지 말아라."


저를 안는 그의 손에 힘이 실린다. 숨쉬기가 답답하다고 생각될때쯤 그의 얼굴이 제 어깨에 묻어지는게 느껴졌다.


"대답해."
"....아...그.....뭐..."
"어서."
".....네... 그럴게요."
"...."


묘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평소와 다를것 없는 목소리고
평소와 다를것 없는 향기인데
몇번이고 안겼던 품이고
수십번 느꼈던 손길인데


이 남자 날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이상했다.
분명히 알고 있는 감정이고 그전까진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도취되어 세상을 얻은것 처럼 뿌듯하기만 했는데
지금의 그는 어쩐지 애처로웠다.


"위험한 짓은 하지말아라."
".....네."
"....."
"해리, 나 괜찮대요. 너무 걱정...."
"부탁이다 에그시."
"....."
"네가 없으면 안돼."


이 상황에 이러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입가에 피는 미소를 감출길이 없었다.
그가 제 표정을 보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하며 저는 그를 마주 안으며 그의 넓은 등을 조심히 쓸어내렸다.


"걱정하지마요. 그럴 생각 없으니까."






4.



<해리하트 총리후보를 테러하려 했던 용의자는 현재 검찰에 송치되어 있습니다. 피의자는 개인적인 감정임을 강조하며 평소 해당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총리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 등등 횡설수설을 하고 있는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검찰측은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하기엔 준비된 약물의 효과가 미약하지만 과학적으로 준비된 것을 미루어보고 배후세력이 있을것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국민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해리 하트 선거인단 측은...>


티비화면이 꺼지고 단정한 네일아트가 되어있는 고운손에 들려있던 리모콘이 바닥으로 가볍게 내던져졌다.


"어떻게된거야?"


미소를 머금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묻는말을 아무도 못듣는거야 설마?"
"면목없습니다."
"오, 헨리. 그게 아니지. 다시 대답해봐. 어떻게 된거냐고 묻잖아?"
"그게 저희는 정확하게 약물을 전달했는데 희석하는 과정에서 용량조절이 잘못되었는지..."
"헨리."
"네?"
"원액을 주고 희석하라고 알려줬어?"
"... 네, 원액을 그대로 사용할경우 약물의 원성분을 알게되고 그렇게 되면 저희 뒤가 더 쉽게 밟힐 염려가..."
"그럼 네가 희석해서 줬어야지."
"..... 송구합니다."
"이게뭐야. 저 앞으로 뛰어든 병아리만한 경호원 하나 다치게 못했잖아. 어떻게 설명할거야 이거."
"다시 작업해서..."
"야!"


날이선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너 정도로 멍청하면 이런 기회가 또 올거라고 생각할 수 도 있는거야? 어? 그래?"
"...."
"찰리, 니가 대답해봐."
"향후 며칠은 시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행사는 없을겁니다."
"며칠? 나라면 선거직전까진 안할것 같은데 왜지?"
"해리 하트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자예요. 그렇게 된 배경에는 시민들의 편에 가까이 다가선다는 점이 한몫하고 있죠. 자신의 지지 기반인 시민을 향한 움직임을 멈추진 않을겁니다. 단지..."
"그래, 단지?"
"경호가 강화되고 1대1의 스킨쉽보다는 무대행사가 많아질겁니다. 이번 사건으로 사설 경호 뿐만아니라 국가 1호경호 시스템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고 경찰동원도 더 많아질겁니다. 시민들과의 만남이 성사되더라도 이틀전 처럼 1m앞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겁니다."
"그래, 그게 문제라고. 헨리, 잘들었지?"
"...네."
"대답은 잘하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공간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고 앞에선 그녀는 그들을 돌아보다가 시선을 내려 테이블위의 꽃병을 당장이라도 던질듯 잡아 들었다.


"정면승부밖에 답이 없죠."
"오, 찰리. 지금 포피 아담스와 해리 하트의 지지율 차이를 알고 그렇게 말하는거라고 믿고싶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 그럼 저 인간좀 털어줄래? 좆같은 먼지가 아직 한톨도 안나왔거든!!"
"테러를 몸으로 막아낸 그 경호원말입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꽃병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선거인단 책임비서 라고 합니다. 저희 집안사람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중인 모양인데..."
"그런데?"
"오메가라고 하더군요."


그 한마디에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짐짓 미소를 지운 그녀는 손에 들린 꽃병을 아무 협탁위에 올려놓고는 팔짱을 끼며 찰리를 흘겨봤다.


"오메가가 뭐 어쨌다는 거야? 형질차별적 발언이라면 더 안좋은 반응만 불러일으킨다고."
"하트 후보가 따로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찾아온게 뭐? 책임비서라며. 책임비서가 다쳤으면 후보가 당연히 문병도 오고 하는거지. 도의상 당연하잖아."
"1인실 병실에 아무도 안들이고 혼자 들어갔답니다."
"....."
"그리고 한참을 안나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녀의 입술이 감탄하듯 벌어졌고 그 입술을 보던 찰리도 빙긋 마주 웃어보였다.


"정치인의 추문은 흔한일이지."
"흔하고 치명적이죠."



-



"그럼 붕대를 풀테니 계속 눈 감고 계셔야 합니다."
"안그래도 지금도 감겨있어요."
"네, 그런데 하루동안 빛을 차단했기 때문에 갑자기 뜨면 홍체반응에 이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네."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대답을 마치자 차가운 손이 얼굴옆에 닿아 붕대를 풀어냈다. 한겹씩 벗겨지고 붕대가 완전히 제거된 것을 느끼고 눈을 뜨고 싶었지만 곧이어 바로 눈에 덮히는 얇은 거즈에 에그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저녁에 다시 풀어드리죠."
"왜 그런 겁니까?"
"눈에 직접적으로 들어간 마취 성분때문에요. 현장에서 비슷한 피해를 입은 다른 환자들의 반응을 보니 처음엔 앞이 점점 어두워지다가 어느순간 동공이 확장되서 빛 차단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낮시간엔 눈을 뜨기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때문에 예정했던 시간보다 8시간정도 더 안정을 취하고 저녁시간 부터 시각을 적응시키는 편이 좋을것 같습니다."
"....."
"해질녘인 저녁6시에 다시 방문드리죠. 더 불편하신건 없습니까."
"범인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와 관련한 정보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뉴스를 틀어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에그시의 말에 간호사는 계속 꺼진 상태였던 티비를 켜고 리모콘을 에그시의 손에 쥐어주고 자리를 정리했다.


"확실한 호전증세에 대해 장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지금은 마음을 편히 놓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무슨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잠시후 주변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 나간건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약간의 텀을두고 들렸다.
간호사가 씌워준 거즈는 꽤나 얇은 편이어서 눈을 살짝 뜨면 빛의 유무가 느껴지긴 했지만 눈앞의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붕대안쪽에서 눈을뜨고 느껴지는건 창밖의 날씨가 맑다는것 티비가 어디쯤 있다는것. 병실의 문앞은 빛이 닿지 않아 어둡다는 것 정도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노동당 경선에서 압도적인 표차이로 총리후보가 된 해리하트 후보자는 이틀전의 테러사건에도 불구하고 금일 예정된 선거운동 지역인 옥스퍼드로 향했습니다.>

<해리 하트 후보자는 현재 여론조사 1위의 후보자 답게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단지 이틀전의 테러사건의 영향인지 시민들과의 직접접촉은 크게 제한되었고 대체적으로 무대인사를 하거나 일부 사전에 검열된 몇몇의 시민들을 직접 접촉하는 등 안전에 만반을 기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고민과 그에 따른 소망은 크거나 과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살기를 바라고 누구든 테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겁을 먹고 숨어버리는 것은 모든 테러범들이 바라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난 그들이 두렵지 않고 시민여러분들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테러가 없는 세상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원래 지켜온 가치들을 계속 지키길 바라는 것은 크거나 과한 소망이 아닙니다. 개인의 노력과 작은소망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트 후보자의 대선연설에 해당 구역에 모인 약 1천여명의 시민들이 환호와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외 지난 14일 하트 후보자를 저격한 테러를 자행한 범인은 아직 검찰에서 조사중에 있으며 피의자는 대선 후보를 위해하려했다는 국가안보법 위반으로 최소 1년에서 최대 3년형의 징역을 받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부 해리 하트의 극성지지자들은 배후세력을 밝혀내야 한다며 개별적 시위를 하고 있으나 검찰측에선 추가 수사의 결과를 아직 발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소리만 듣는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 한손을 들어 눈앞을 가리며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해리는 신경쓰지 말고 먼저 안정을 취하라고 했지만 테러범의 정체가 여간 신경쓰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해리가 잘못되면, 대선에서 떨어지기만 해도 저가 이루고 싶어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
어떻게 쌓아올린건데... 여기까지 어떻게 온건데...

에그시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결국 리모콘을 들어 티비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만일 저 테러범에게 배후가 있다면 그들 모두를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저녁늦게야 돌아온 집은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 있는 것처럼 거실불이 켜져 있긴 했지만 집안 어디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제 스스로 겉옷을 벗으며 부엌과 침실문을 연 해리는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아 차리곤 작은 한숨과 함께 겉옷을 챙겨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조용한 가정환경 코스프레는 할 수 있지만, 화목한건 기대하지마.'


부인의 말에 저는 숨소리와 함께 가볍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었다. 아이가 한창 성장기 였을때 워커홀릭이었던 아버지와 거의 담을 쌓은 아들과는 더 얘기할 것도 없었다. 아마도 어디선가 친구들과 놀고 있을게 뻔했지만 그저 나쁜일을 하거나 범죄에 연루만 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 옷장에 가지런히 걸어둔 해리는 주머니속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의 단축키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몇번 울리지도 않은 전화를 받은 반가운 목소리에 저절로 미소가 핀다.


"붕대는 풀었니?"
[아, 해리. 타이밍 최고네요. 조금 전에 막 풀었어요.]
"내일 아침 퇴원인가?"
[아니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어서 지금 짐싸고 있었어요. 의사는 아침에 해가 뜨면 조심하라곤 하는데 선글라스 쓰면 괜찮겠죠 뭐.]
"그래도 조심해야지."
[걱정마세요. 오늘 선거운동은 어땠어요? 내가 없으니까 영 별로죠?]


장난스레 건네는 목소리에 해리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뉴스봤어요. 정확히는 들은거지만.]
"그래."
[연설도 들었구요. 테러 키워드를 뽑은건 잘 하신것 같아요. 요즘 아무래도 그 얘기가 화두에 올라있으니까. 해리는 다치지 않고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이걸로....]
"에그시."
[네?]
"좋은기회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음... 그래도....]
"네가 다칠뻔 했잖니."
[....네, 하지만 괜찮은데...]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한구석이 저려왔다. 그순간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병원에 가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이 젊은 친구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하는듯 했다.


"테러와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해 말해본적이 없을정도로 말이다."
[......]


수화기 넘어에선 별다른 대답이 없다. 항상 모든 대답에 발랄하게 대답을 이어가던 그는 요즘 들어 가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지 않는 일이 잦았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은건지, 아니면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건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번도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간신히 붙어있는 마음이 떠버린게 아닐지 그게 걱정스러웠다.

물론, 그가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거나 완전히 사랑하리란 기대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우린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으니까. 단지 저에게 그가 바라는 것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삶에 웃음을 주는 유일한 존재에게 그만한 가치는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마세요.]
"그래."
[병원에서는 내일 낮에만 조심하면 된다고 했어요.]
"응."
[내일 하루정도는 차에서 동행하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집에서 하루 더 쉬지 않고서."
[보고싶어서 안되겠는데요.]


다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그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신경쓰지 않게되었다.
그저 그가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5.


해리의 집앞으로 도착한 에그시는 평범한 선거운동 기간일 뿐인 그의 집앞에 모여있는 몇몇의 기자들과 또 몇몇의 지지세력들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이슈가 있습니까?"
"네?"
"기자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 말입니다"


고작 4일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갑작스레 달라진 분위기에 에그시는 경호실장에게 저도모르게 날을 세운 목소리를 전달했다.


"큰 이슈는 없습니다."
"그럼 기자들이 모인 이유는 뭡니까?"
"아마..."


한번에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에그시는 운전석 뒤로 몸을 숨기며 그들을 한 번 더 살펴봤다.


"책임실장님 때문인것 같습니다."
"저요?"


그말에 누구보다 동그란 눈을 하고 조수석에 앉은 그를 돌아봤다.


"그날 후보자님의 테러를 몸바쳐 막은것으로 유명세가 조금 생기셨습니다."
"아..."
"게다가 정체를 궁금해하는 시민들도 생겼고 일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의인이라며 앞세워 말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젠장.
유명해지는 것은 그만큼 불리했다. 그런것을 원한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면 자신의 운신이 조금 더 제약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될 수 있는데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마 실장님의 그 미모도 그 유명세에 보탬이 된 것 같구요."


경호실장의 장난끼 어린 말에 에그시는 그를 곱게쳐다보지 못했다.


"아, 비하발언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 사이에선 이미 실장님을 잘생겼다고 치켜세우는 경우도 있어서..."
"실장님."
"네."
"후보자님 의전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괜히 차에서 내렸다간 엉뚱한 방향으로 화살이 갈 것 같네요. 후보자님께 쏠려야할 주목도를 뺏어가서 좋을건 없을듯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답과 함께 경호실장이 내렸고 바로저택으로 들어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를 데리고 나왔다. 집앞으로 나온 해리는 시민들과 인사를 하고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몇마디 대답을 하고는 저가 탄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오랜만이네."


사람들 앞에서 격식있게 바뀌는 그의 모습은 언제봐도 소름끼치게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이 사람이 자신과 단둘이 있을때 어떻게 변하는지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의 가장 비밀스러운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 억지로 힘주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저 역시 격식을 차려 대답했다.


"네,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건강이 상한일인데 어쩔 수 없지. 오늘 일정은."
"네, 오전중 차량으로 웨일즈까지 이동할 예정이고 여기 대본입니다."
"기차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후보자님이 기차역으로 올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파가 집중되었습니다. 이동이 까다롭고 다른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칠것이 염려되어 자동차로 이동하겠습니다."


깍뜻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에그시를 가만히 보던 해리는 그의 말이 끝났음에도 대답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가 에그시가 시선을 맞추며 의아해하자 소리없이 미소지으며 등받이에 깊게 기댔다.


"알았네."


바로 대본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다시 에그시를 바라보지 않고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 기다란 손끝이 종이위를 가볍게 훑고 그의 굳게 다물린 얇은 입술이 어느순간 살짝 벌어져 입에 맞지 않는 문장을 여러번 곱씹어 읽어보고는 품속에서 안경과 펜을 꺼내 일부 문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리지?"
"약 3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자네도 좀 쉬게."
"....."
"그런 테러를 당한지 얼마 안되지 않았나."
"아... 네, 괜찮습니다. 지금은 완쾌해서 무리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


여전히 대본을 읽어내려가는 해리는 다시봐도 그림 같았다. 정갈한 수트와 눈앞의 안경. 기다란 손끝에 걸린 펜과 의자아래 가지런히 놓인 발끝까지 전부.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것을 느꼈는지 대본에 빠져 있던 해리가 고개를 들며 안경을 벗고는 시선을 맞춘다. 다시 맞춰지는 시선에 아무말없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고 미소를 지었더니 그의 양쪽볼에 보조개가 파이며 기쁜듯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펜을들어 대본 구석에 뭔가를 끄적거리다 저에게 내밀어 보인다.


'고맙다. 건강히 돌아와줘서.'


종이를 다시 거둬가는 그의 손끝이 실수인양 제 손등을 살짝 긁고 지나간다. 그 은밀한 행동이 실수가 아니라는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까.

그의 조심스러운 표현에 에그시는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다가 작게 미소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와 닿을 수록 간지러우면서도 요즘들어선 답지않게 약간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기분에 취해있을 마음도 없었지만.



-



"지금 세계는 목적없는 테러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우리 영국의 시민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대체 국가 안보에 어떤 구멍이 생겨 우리 시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건지 현 정부는 그 안보에 무슨 책임을 지고 있는지 투명하게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신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단 한명의 시민이라도 슬픔에 울부짖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음 정부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그 누구도 쉽게넘보지 못할 강국으로 거듭나야 하며..."


포피의 열띈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새롭게 감화에 젖는듯 했다. 개중엔 대놓고 불법 이민자들의 무조건 적인 추방이나 이민족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수정당의 집회에선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연설자와, 그 연설에 감화된 사람들의 표정을 보던 찰리는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품속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가시적으로는 포피역시 해리에 대적할만큼의 인기가 있는것 처럼 보였지만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는 그녀는 해리와 조금도 대등하지 않았다. 다른 군소보수 후보들과 연합을 하면서도 3~4년전부터 인기 정치인으로 떠올라 최근 50%가 넘는 지지율을 확보한 그를 이기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하아...."
"무슨일이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냥 피곤해서요."
"오늘도 일정이 많습니다. 잠시 차에 가서 쉬시는것도 나쁘지 않을겁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면 미스 아담스가 가만있지 않을걸요."


찰리의 농담섞인 어조에 상대는 피식소리를 내고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상대의 말에 가볍게 미소짓고 남은 연설을 듣던 찰리는 생각에 잠긴듯 먼곳을 보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십수년이 흐르는 시간동안 잊고 있었던 먼 과거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귓가에 스쳤다.



'그래서? 넌 알파가 된거야?'
'응. 그렇대.'
'와...'
'왜 그렇게 보냐.'
'아니. 신기해서. 친구들중에 니가 제일 빠르지 않아?'
'그런것 같다. 아빠도 13살에 시작했대.'
'그것도 유전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짧게 자른 머리에 올리브색 눈빛을 하고 선 제 친구는 저를 올려다보며 연신 감탄의 말을 했었다.


'나도 알파일까?'
'글쎄.'
'아빠는 뭐든 상관없다고 하는데 엄마는 내가 알파이길 바라는것 같아서.'
'그건 왜?'
'나도 잘몰라. 그냥 알파였으면 좋겠다. 엄마가 속상한건 보기 싫어.'
'기다려보면 알겠지.'


형질이 발현된 이후에도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3년뒤 오메가가 되었고 이상하게도 우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처음엔 집안환경이 달라 생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10대후반이 되어 생활수준이 맞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소비생활도 달랐고 친구들도 달라졌고 삶의 목표도 달라졌으니까...


'미안...'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그럼 왜...'
'그냥... 너랑은 안맞는 것 같아서.'


이상한 거절이었다. 10년을 넘게 친구로 지냈으면서 그는 자신과 안맞는다는 소리를 했다. 그렇게 안맞는 사이라면 그동안 친구는 어떻게 했냐는 질문에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 어설픈 고백 이후 우리는 친구도 아닌 관계가 되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남이되었고 나는 그가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그는 내가 이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이잉-'


짧은 진동에 이어 휴대폰 메시지함에는 아무 설명없이 숫자 11자리가 찍혀있었다.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찰리는 답장버튼을 눌러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입꼬리가 살짝 당겨 올라갔지만 오랜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는 기쁨은 아니었다.
미안, 에그시. 너에게 나쁜감정이 있는건 아니야. 오히려 좋은 감정이라면 좋은 감정이랄까.

....너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잖아.



-



호텔방문을 열고 먼저 들어선 에그시는 뒤따라 들어온 해리를 복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고는 경호실장을 물리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은은히 퍼지는 그의 향기에 비식대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못하고 몸을 돌려 문에 등을 기대어 섰다.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 그의 노골적인 향기를 맡으며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욕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침대위에 가지런히 벗어둔 그의 수트를 들어 옷장에 정리해 넣어두고는 그 곁에 자신의 수트도 벗어 걸었다. 협탁위의 샤워가운을 들어 팔을 넣다가 잠시 멈칫한 에그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소지었다. 손에 들린 샤워가운과 속옷을 벗어 주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욕실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저의 예상대로 욕실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수증기가 가득찬 욕실의 안쪽 반투명한 유리벽 넘어로 욕조에 들어가는 그의 실루엣이 비쳤다. 바닥에 물기로 남겨진 그의 발자국을 따라 반투명한 유리벽에 손을 짚고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를 바라보니 욕조에 기댄 그는 큰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는 가볍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에그시는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며 그를 부를까 하다가 소리없이 다가가 그 욕조 안으로 한쪽 발을 넣었다. 물속에서 스치는 감각으로 눈을 뜬 그가 천천히 눈을 올려 여전히 미소 지은채 전라의 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는 시원하다고 표현하는, 저에겐 조금 뜨거운 수온탓에 발끝부터 붉게 물들어 물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무릎과 허벅지 허리께가 점점더 붉어지고 이내 그에게 닿기 위해 뻗은 손끝이 빨갛게 익었다.


"온도를 낮출까."
"괜찮아요."


아무리 뜨거워도 당신의 눈빛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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