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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존조] 센티넬

리퀘박스 32 181006 리퀘 [파인존조] 센티넬




* 급전개주의, 오타주의, 노잼주의.
* 7,800자 이후 유료게시 (총 38,6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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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금발에 파란눈. 악의가 전혀 없어보이는 듯한 맑은 웃음과 피드백도 없는 저를 향해 계속 흔들고 있는 작은 손바닥. 벌써 이게 몇번째 인지 모른다.


"안녕~~"


한 번 더 인사를 시도하는 그라운드 12 구역의 유명한 플러팅보이. 아니, 보이라기 보단 가이에 가까웠지만. 이름이 크... 뭐라고 했던것 같은데... 그의 손목에 빨간 팔찌가 흔들리는걸 봐선 그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금색줄이 두번 꼬아진 상급 센티넬. 거기에 비하면 저는 금색줄은 꿈도 못꾸는 신입 가이드 였고. 이런 비교도 안되는 수준의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인사를 한다? 뭔가 내기를 했거나, 비공식적인 신입교육이거나, 이 구역에선 유난히 보기드문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이겠지. 대답없이 지나쳐 버리니 등뒤에서 한숨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냥 인사한거야..."


그리고 주변의 벙커형 코너에서 튀어나온 그의 친구들이 그를 놀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만 봐도 지독한 장난인 것은 틀림없다.



-



12구역에 들어온지 6개월 정도 흘렀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고 얘기할만한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조금 친해질만 하면 파트너 센티넬을 배정받고 신입 훈련소를 떠나는 통에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지겨워졌다. 결국 가이드 훈련소에서 오며가며 마주친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거나 강사들하고 얘기하는 것이 전부인 지금은 조금 외로웠고, 조금 지쳤다. 밖에 있을때만 해도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하는 건 전부 남의 이야기 였는데.


"존."


누군가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다.


".....?"
"매번 혼자 있네. 혼자 있는걸 좋아하는건가?"


뭐라고 아는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몇 번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레너드."
"네?"
"내 이름 생각 안나는 눈치여서."


손끝으로 본인의 머리를 툭툭 치며 장난스레 웃어보인다. 그결에 그의 손목에 걸린 파란색의 팔찌가 보였다. 금색줄이 두번 감겨 있는 상급 가이드. 신입이 아니라면 역시 체력단련소에서 본 거겠지. 그나저나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기억하는걸까.
 

"아... 제가 기억력이 좀 안좋은 편이라서."
"그래서 벌써 수십번은 인사했을 것 같은 사람의 인사도 씹는거야?"


그의 말투는 장난끼가 가득했지만 어휘는 그렇지 않았다. 괜히 날이 선듯한 어휘에 읽고 있던 책을 조용히 덮으니 그가 옅은 숨소리로 웃으며 손사레를 친다.


"크리스 말이야."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 눈에 익은 그가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어 댄다. 그래, 이름이 크리스였지. 도서관에 자리잡은 사람치곤 그의 손앞에 다른 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한테나 플러팅 하기로 유명하던데요? 관심있으면 저 신경쓰지말고 가서 얘기해보세요."
"내가? 푸하하. 쟤는 그냥 친구야. 뭐 몇달전까지만 해도 파트너 가이드 였지만."
"....."


센티넬과 가이드로서 파트너라고 하는건 보통 사람들의 연인관계와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치면 이들은 서로의 엑스가 아닌가? 조금은 혼란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한손으로 턱을 괴고 비스듬히 앉으며 재밌다는 듯 저를 훑어봤다.


"그보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치챌정도로 들이대는 상급 센티넬을 안받아주는 이유가 뭐야?"
"받아줘야할 이유는 뭐죠."
"뭐... 어차피 여기선 다 짝을 만나게 되어 있는데 기왕 생길 짝이라면 고르는 쪽도 나쁘지 않잖아."
"고르는건 저쪽이 고른거지 제가 고른게 아닌데요."
"날이 많이 서있네."
"그리고, 별로 대화한 기억도 없는데 여긴 일방적으로 반말을 많이 하네요."
".... 몇 살인데? 10대 아니야?"
"허! 당연히 아니고, 10대라고 해도 막 반말 듣고 싶진 않은데요."
"그럼 너도 반말해. 그럼 되잖아."


그의 능글맞은 표정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어이, 레너드."


거의 아침마다 인사로 듣던 그의 목소리가 다른 문장으로 들렸다. 그리고 대체 어느새 여기 와있는거야.


"존. 레너드가 괴롭혀? 텃새부리는거야?"
"너도 내가 10대로 보이나 보지?"
"....에?"


벌떡일어나 그를 바라보며 쏘아붙이니 그가 되려 한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에 앉은 레너드의 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무슨말이야. 그리고... 10대 아니야?"
"10대면 반말해도 돼?!"
".... 안되나?"


질렸다. 예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것들과 상종하는게 아니었다.
제발 신이시여, 저에게 센티넬이 생기더라도 최소한 예의있는 놈으로 배정해주세요!



-



"흔히들 폭주한 센티넬을 신체접촉으로만 진정시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 훈련된 센티넬과 가이드는 정서적 교감으로 원거리에서도 진정 시킬 수 있습니다. 화면보시죠."


강사가 틀어주는 커다란 화면에 불꽃으로 휩싸인 인간의 형태가 보였다. 정확히는 불의 여신과 같은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듯한 그녀는 불꽃을 품은 눈빛과 멍한 얼굴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폭주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감정으로 분노나, 눈물을 상상했던 자신에겐 다소 신선한 모습이었다. 손에 든 모든 물건이 무기로 변하는 것을 보며 공포심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무렵 그녀를 둘러싼 불이 점점 잠잠해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그런 화면을 처음 보는 신입 가이드들은 탄성을 내기도 했고 저마다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모든 동작이 멈추고 온몸을 감싼 불꽃이 모두 사그라지자 불에 그슬리고 터진 옷을 입은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빛에 머금은 불빛이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에 가려질때 누군가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며 시야를 가렸다. 아직 뜨거울 센티넬을 품에 끌어안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누가봐도 그녀의 가이드 였다. 그리 크지 않은 신체에 평범하기 그지 없는 가이드였음에도 센티넬은 겨우 눈을 껌뻑이고는 상대의 등뒤로 타지 않은 손을 올려 가볍게 도닥였다. 자료화면은 거기까지 였다.


"장면을 보면 가이드와 신체접촉을 하기전 폭주가 미리 사그라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시 가이드는 자신의 센티넬이 폭주한다는 것을 알고 사건 장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이드는 끊임없이 센티넬에게 자신의 신호를 보냈고 센티넬은 이성이 끊긴 상황속에서도 가이드의 신호를 눈치챈거죠.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각인인가요?"
"네, 그럼 각인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질까요?"
"성관계요."


평소 장난기가 많던 가이드 하나가 거침없이 답을 말했고 주변은 그의 솔직한 발언에 키득 거렸다. 그리고 강사는 그 말을 부인하지 않고 살짝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꼭 그 방법만 있는건 아니죠. 어차피 여기 계신 모든 가이드 분들은 자신의 센티넬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던 센티넬과 눈이 맞아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가이딩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둘의 사랑이 끝났을때 남겨진 각인은 어떨까요. 각인은 재조합 되지 않습니다. 물론 가이드는 자신의 센티넬이 죽을경우 각인이 끊어지며 새로운 센티넬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끝나도 각인은 남겨진다. 그 센티넬과 그 가이드는 어떤 고통속에서 남겨진 여생을 살게될까.
잠자코 수업을 듣기만 하던 존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고 강사는 그를 가리키며 발언 기회를 줬다.


"각인이 꼭 필요한가요?"
"조금전 화면에서 본 센티넬 기억하시죠? 만일 그녀에게 각인된 가이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
"눈에서 불꽃이 핀다는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닙니다. 결국 자신의 폭주에 내면이 무너져 미쳐 죽었을겁니다. 정신이 무너지고 난 뒤엔 가이드를 만나도 회복되지 않죠. 하지만 눈에서 불꽃을 보인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죽지도, 미치지도 않았습니다. 각인된 가이드가 있었기 때문이죠."
".... 그럼 우리는 센티넬의 목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인가요."


가이드의 역할은 오로지 센티넬의 폭주를 막기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외엔 다른 능력도 특별할 것도 없었고 평소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는 훈련을 받는 센티넬들과는 달리 가이드들은 항상 쾌적한 강의실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교육영상을 보고 토론하거나 가끔 체력 단련을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이 강의는 어쩌면 순화된 최면이 아닐까. 너희는 센티넬을 가이딩 함으로써 세상을 지키는 힘을 가졌다 같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말씀드리죠. 여기 그라운드 12 구역의 센티넬은 모두 132명입니다. 이들 모두가 어느날 가이드 없이 폭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들끼리 싸우겠죠?"
"전쟁이 나나?"
"도망가야겠다."


신입가이드들에게 다수의 센티넬의 폭주는 그저 남이야기 일 뿐이었다.


"이곳은 파괴되어 없어질겁니다."
"....."
"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가이드에게도 가차없죠."


좌중은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강사의 눈은 조금 매서워졌다.


"이 곳이 파괴되는데 까지 6시간이면 가능할거고, 2주안에 인근의 도시를 파괴할 겁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2개월이 걸리지 않고, 반년이면 전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전에 죽일 수 있는 모든 생명을 죽이고 스스로 미쳐서 죽고 말겠지만 말이죠."


무서운 말을 전하는 그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담담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가이드로 태어난 이상 센티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입시키고 있었다.


"물론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각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크리스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벽시계를 본 친구들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소리를 내고 웃었다.


"나 간다."
"그만 하면 포기해라."
"아니 수준도 안맞는 신입 가이드를 왜 죽자고 쫓아다니는거야."
"차라리 레너드를 제대로 만나던지."
"걔는 그냥 친구라고."
"그럼, 니가 쫓아다니는 애는 운명의 각인이라도 되냐?"


막대과자를 씹으며 비아냥 거리는 친구를 내려다본 크리스는 한쪽으로 가볍게 웃고는 그 친구의 어깨를 '툭'소리가 나게 쳤다.


"어, 운명인듯."
"염병한다."
"걔 얼굴이 반반하긴 하잖아."
"그런 신입 가이드가 이 새끼 폭주 막을 수 있겠냐고. 레너드도 너 못버텼다며."
"그만해라."


겉옷을 급하게 챙겨입은 크리스는 가이드들의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달려나갔다.



-



아침의 맑은 날씨와는 다르게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맑으면 잔디밭 위에 앉아 음악이라도 들으며 여가를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모두 틀어졌다.


"비오네."


누군가 옆에 가까이 서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다. 같은 수업을 듣고 있던 가이드 학생중 하나. 책을 안아든 그녀의 손목엔 금줄이 없는 파란색 팔찌가 선명했다.


"누가 가까이 서면 팔찌부터 보는건 버릇이예요?"
"... 네."
"왜요? 센티넬이면 피하게?"
"글쎄요. 그냥 저도 모르게 그러네요."
"전 여기 온지 3달정도 됐어요."
"저는 6개월이요."
"뭐 즐겁진 않지만... 항상 왜그렇게 심각해요?"
"...."


존은 대답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묻는것은 처음이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게 별로 달갑지 않아서요."
"저두요."


대답을 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난 점심먹으러 갈건데. 같이 갈래요?"
"그래요."
"난 캐런이예요. 그쪽은?"
"존이요."


처음으로 식당까지 가는길에 동행이 생겼다. 그녀는 바운더리 안쪽 생활이 답답하다고 했으면서도 스스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다. 사실 그건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사고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린 평생을 통제된 곳에서 살아야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또 불쑥 튀어나오는 익숙한 얼굴. 이 상황에 적응한 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동행하던 캐런은 적잖이 놀랐는지 '헉'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두어걸음 물러서며 심호흡을 했다.


"어디가는 길이예요?"
"....."
"밖에 비도오고 외출하긴 완전 별로죠.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차라도..."
"존댓말 하네요."


존의 목소리를 처음듣기라도 한건지 큰눈을 더 크게 뜬 크리스는 놀라움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잠시 멍청하게 있다가 말을 이었다.


"네네. 아 그... 전에는 미안했어요. 저는 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12구역에 소문난 철벽남과 플러팅가이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 잘생긴 센티넬에겐 이미 추종 세력도 있었다. 신입들중 일부는 그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꽤 오랜시간 혼자 있었던건 어쩌면 이 사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저는 생각없어요."
"아.... 그... 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람인데. 물론 첫인상을 좋게 남기는건 실패했지만 사람을 겉만보고 판단할 순 없잖아요. 차라리 겉만보고 판단한다고 하면 또 제가...."


인사도 없이 크리스를 지나쳐 가려는 사이 그의 손이 급하게 저를 잡았다. 갑자기 잡힌 팔목이 뜨거워 괜한 공포심에 팔이 잡힌채로 그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그냥 얘기만 잠깐 하면 안될까요?"
"놓으세요."
"전 크리스예요. 크리스 파인. 28살이고 캘리포니아에서..."
"이거 놔."


존의 단호한 목소리에 크리스의 손에 힘이 풀렸다. 잡혔던 곳이 붉게 변했다. 잡혀진 악력도 있겠지만... 그는 불의 기운을 가진 센티넬이 분명했다. 조금전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 한 것이겠지. 이 경솔하기 짝이없는 카사노바가 왜 저에게 이렇게 꽂혀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12구역에 드문 동양인이라서? 유일한 동얀인 가이드라서? 듣자하니 각인없이 파트너만 여럿 바뀌기로 유명한 센티넬이니 자신도 몇번 이용당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안좋아졌다.

저에게 가까이선 캐런에게 사인을 보내고 바로 장소를 떴다. 꽤많은 시선이 저를 향한것이 느껴졌지만 이젠 더이상 그런 것에 게의치 않기로 했다. 이것 역시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결정이다.



-



크리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대로 거절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런저런 살까지 붙어서 번졌다. 덧붙은 살을 모두 제거하고 핵심만 되짚어도 크리스가 존에게 차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으니 다른 건 별로 재고할 필요도 없었다.


"그만두라니까 말도 드럽게 안들어."


항상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도 그가 지금 어딨는지 모른다는 말에 레너드는 작정하고 크리스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순간 그녀석을 위로해줄 사람은 저 뿐이었으니까. 이 곳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이 구역에서 그가 고독을 즐길만한 공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운동장 한켠,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벤치의 뒤쪽 계단에 한쪽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제 발걸음 소리를 들을법도 했지만 크리스는 뒤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아마 보지 않아도 저라는걸 알았을 것이다.


"안지겹냐?"
"... 약올리려고 왔냐?"
"응. 궁상떨길래."


약올리려는 의지가 가득한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크리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옅은 한숨만 한번 더 내쉬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상급 가이드를 쫓아다녀."


그의 팔옆에 '털썩'소리가 나게 주저 앉은 레너드를 힐끔 바라본 크리스는 반대쪽 팔을 내밀어 보였다. 그의 손목에 걸린 파란색 팔찌엔 두개였던 금줄이 3개로 늘어나 있었다.


"너...."
"지난 훈련때 하나 더 달아주더라."
"와우...."
"여기 12구역에 날 감당할 가이드가 있겠냐?"
"뭐... 여긴 아직 A급 정도 밖에 없으니까. 그거 보면 기가 질려서 돌아가겠다."


크리스는 팔찌를 소매속으로 감추며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가이드한테 들이대는거야? 야, 너 그거 자살행위야. 차라리 여기저기 플러팅 하다가 걸리는게 낫지."
"아닐 수도 있지."
"뭐가."
"가이드는 100% 타고나잖아. 사실상 신입이라는 말은 몇등급인지 모를때 내리는 등급 아니냐?"
"그렇지."
"그럼 나랑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도박이잖아."
"....."
"하고많은 사람중에 왜 그사람인데?"


레너드는 한심하다는 듯 크리스를 내려다 봤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먼 곳을 보며 옅은 숨을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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